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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 조천면 마을 구장 한백흥(1897생, 남)이 함덕리 출신 청년(김기준, 21세)을 가리키며, “이 청년은 선량하다.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책임지고 대한민국의 착한 백성으로 만들겠다”며, 선처를 요청했다. 마을 원로 송정옥(55)도, “사람을 죽이려면 주민 들이 안 보는데서 죽여야지, 이렇게 보는 앞에서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는가? 외국 에도 이런 일은 없다” 항변했다. 그는 일본에서 살다 귀향한지 얼마 안 됐었다. 그 러나 군토벌대는 두 원로의 요청을 묵살하고 주민들 앞에서 청년 6명과 함께 두 원로도 총살했다. (함덕리-비석 한백흥·송정옥 추모비, 참조) 1949년 1월 19일, 이번에는 고사흥(47, 남) 등 평사동 주민 17명이 도피자 가 족이란 이유로 3구 집단소에 수용됐다 이곳으로 끌려와 총살됐다. 고사흥의 동생 고사의(2003년 79세, 남)가 증언했다. “이때 희생자들은 모두 장년 이상의 연로 한 사람들이었어요. 집에서 잠자다가 끌려나가 총살당했죠.” 이곳 주민으로 이날 학살을 목격한 고기원이, “저 백사장… 조금 높은 디. 지금 집 지어진 디라. 거기 가 솔나무지대랐어. 우리는 백사장 좀 높은 디 앉고. 그때가 한 십여 명? 이 팽사 동 사름이라. 음력으로 (1월) 20날이니까… 그 전날이 북촌(대학살)이라실꺼라” 당시를 기억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모살밭에 자기가 죽을 구덩이를 파라고 한 후 동산진 곳에 앉으라고 하여 총살했고, 평사동 주민들은 이 광경을 관뒛모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