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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소재하고 있었다. 이 주재소는 해방 후 함덕지서로 이름만 바뀐 채 남아 있었다. 선거 날, 함덕리는 인적이 뚝 끊기고 ‘지서만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1948년 11월, 군병력이 함덕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되면서 함덕리는 명실상부 한 북제주군 동부지역의 토벌 근거지로 변했다. 대토벌기,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모래밭은 대부분 학살터일 정도로 일상적으로 총살이 이루어졌다. 함덕 주민들이 군부대에 끌려가 처형되기도 했지만 주변 마을 사람들이 끌려와 군부대 주변에서 학살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함덕리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선흘, 대흘, 교 래 등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많이 소개해 내려왔다. 이들 대부분은 민가의 부엌이 나 외양간을 빌려 피난생활을 했다. 당시 이들 중 도피자 가족 수용소에 수용됐던 사람들이나 1949년 봄 귀순해 내려온 피난입산자들 중 상당수가 군부대에 끌려 가 즉결 처형되거나 다른 지방 형무소로 이송됐다. 다음은 함덕리의 주요 학살사 건이다. 1948년 초, 4·3무장봉기가 일어나며 무장대의 습격이 몇 차례 있었다. 1948년 4월 3일: 강정문(24, 남, 지서장), 장두백(22, 남, 경찰)이 함덕지서를 습 격한 무장대에 납치됨. 강정문은 선흘곶에서 살해되고, 장두백 은 행방불명됨 5월 13일: 강봉현(20, 남, 지서장), 고선삼(22, 남, 삼도리), 김경문(56, 남), 송만석(22, 남, 태흥리), 홍기조(48, 여) 5명이 함덕지서를 습격한 무장대에 살해됨. 이날 김사승, 부두천, 양맹세, 이인옥 4명도 희생됐으나 현재 희생자신고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짐 그러나 토벌대는 훨씬 가혹했다. 1948년 4월 14일: 강창효(73, 남)는 사위 김태근이 산에 있다는 이유로 함덕지서 로 연행돼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이틀 뒤 사망함 11월 4일: 토벌대는 무장대가 조천면사무소를 습격하자 함덕리, 신흥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