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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후기 의병항쟁과 ‘남한대토벌작전’ 49 키로 되어 있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 지 못하자 10월 30일까지 연장하였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첫째 일제의 의병 진압이 시 작된 이후 최대규모의 일본군 병력이 특 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점, 둘째 토벌 작전에 군병력 외에 경찰·헌 병대는 물론 면장과 이장 등 지방의 말 단 행정기관까지 총동원되었다는 점, 셋 째 일정한 지역을 밀집수색하여 토벌하 는 이른바 ‘교반적(攪拌的) 방법’을 사용 하여 은둔한 의병까지 철저히 색출하였 다는 점, 넷째 작전 범위를 확대해 내륙 은 물론 해안 도서지역까지 병력을 동원해 의병의 퇴 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일제는 촌락을 포위하고 면장과 동장을 불러 미리 조사해둔 남자 명부나 민적(民籍) 등에 기록된 남자 를 일일이 대조 점호하고, 의심스러운 자는 ‘폭도’ 탐 정의 단서를 잡고, 또 사람들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심문하여 ‘폭도’로 포박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그들 은 일진회원 등 친일파를 앞장세워 마을을 한 번 수 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수색한 마을을 돌연 다 시 돌아가 수색하는 방식으로 토벌대를 피해 숨었다 가 나타나는 의병까지 샅샅이 뒤져 체포하거나 처형 하였다. 이러한 작전 원칙에 따라 모든 마을을 적어 도 2회 이상 수색하였으며, 특별히 의병과의 관계 혐 의가 짙은 마을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수색을 거듭하였다. 이렇게 행해진 일제의 ‘대토벌’ 상황을 목격한 전 라남도 장성의 유생 기우만은 “적의 세력은 더욱 치 성하여 주재하는 병참이 별처럼 벌려져 있고 바둑 처럼 두어져서 주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산과 들 을 샅샅이 뒤졌다”라고 하였다. 또 광양 출신의 선비 로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자결한 매 천 황현 선생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사방으로 그 물치듯 해놓고 촌락을 수색하여 집집마다 뒤져서 조 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행인의 발 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강자는 돌출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자는 기어 도망 하다가 칼을 맞았다”라고 하는 기록을 남겼다. 일제의 ‘대토벌’ 종료 후 전남경찰서가 보고 한 토 벌 결과(1909년 8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를 보 면 사망한 의병은 420명, 체포 또는 자수자가 1,687 명이었다. 물론 최종 완료 때까지의 결과는 이 수치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심남일, 안규홍, 황두일, 박영근, 양진여, 모천년 등 약 26명의 주요 의병장이 일제 당국이 남긴 호남의병의 항 쟁기록 『전남폭도사』 2017년 6월 1일 광주시 당국이 개최 한 제7회 ‘무등산국립공원 의병길 걷 기대회’ 안내 지도(이상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