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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철 선생 49 1931년 11월에는 중국인과의 공동항일전 선을 형성하여 중국항일대동맹을 조직하고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伍澄千)·서천방(徐天 放)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후 신국권(申國權)의 주선으로 미국인 피치(S. A. Fitch)와 교섭하여 김구 등과 함께 피치의 집으로 이주하여 20여 일을 은신하였다. 일 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항저우(杭 州)로 이전하였다. 5월 15~16일 개최된 제1 회 국무위원회의에서 군무부장에서 재무부 장으로 직무가 바뀌었다. 1932년 11월 30일 오후 8시 반경 상하이 프랑스조계 중국인 황전영(黃展榮)의 집에서 일제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감 금되었다. 변호사 채효백(蔡曉白)이, 김석과 함께 1929년 10월 중국에 귀화하여 받은 국 적증명서를 상하이의 프랑스영사관에 가져 다주었다. 이에 프랑스영사관은 프랑스조계 에 들어와 이들을 체포한 것은 불법이라며 일본영사관에 강경 항의하였고, 곧 석방되 었다. 1933년 10월에는 2년 임기의 제12기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3월에는 송병조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대표 로 난징[南京]에서 개최된 한국대일전선통일 동맹 제2차 회의 및 한국혁명 각 단체 대표회 의에 참가하였다. 4월 2일 국무회의 비서장 으로 선임되었다. 1934년 4월 하순 급성폐렴에 걸려 5월 4일 항저우 신민로(新民路) 광자병원(廣慈病院)에 입원하였다. 6월 20일 갑자기 병이 악화하여 6월 29일 오후 6시 사망하였다. 그가 순국한 후 후처 최혜순은 상하이에서 3년을 더 머무 르다 여덟 살, 여섯 살이던 두 딸을 데리고 귀 국하였다. 그러나 그녀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본 경찰의 감시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철이 1932년 11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34년 4월 20일 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 김철 명의로 미국 에 있던 이원순에게 발송한 공문(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