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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31년 경남 울주에서 출생하여 6.25에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육군 대위 로 예편하였다. 그리고 4.19 이후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민자통 조직위 간사로 활동하던 중 5.16 이후 수배되었다. 그리고 ’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후에도 유신반대 민주와 민족통일을 위하여 투쟁 하시다 유신독재권력에 의해 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75년 4월 9일 이날은 국제 법학자협회에 의해‘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 된 날이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조작된 8명이 유신 정권의 철저한 조작으로 사법살해된 날이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군사정권 18 년간의 여러 인권유린 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문 조작사건이다. 굴욕적 인 한일회담으로 야기된 6.3 사태의 과정에서 정권은 반정부 시위를 잠재우고,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통해 대구지역인사들을 도예종씨를 당 수로 하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1차 인혁당 사건은 검찰 조 사 과정에서 고문을 통한 조작이 밝혀지고, 아무 증거도 없이 조작된 사건의 기 소를 이용훈 부장검사 등 3명의 담당 검사가 거부하면서 이들 검사들이 사표를 제출하게 되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진다. 당시 중정의 대대적인 발표와 달리 도씨 등 몇명만이 인혁당과는 무관한 과거의 사상적 경향을 이유로 실형을 받고 사건 은 일단락된다. 중정의 사건 조작이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이 다시 세인들의 관심 을 끌게 된 것은 1차 인혁당 사건 발생후 10년이 지난 ’74년의 일이다. 유신에 항 거하기 위한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저항이 가열되고 조직화되자 위기를 느낀 정 권은 또다시‘조작’의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정권은 분단 상황에서 국민들이 레 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며 이철, 유인태 등의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을‘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으로 역어 사형선고까지 내리 면서 이들 학생의 배후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내 지하조직이라며 10년전 사 건 조작에 실패했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체포, 대규모 간첩단을 검거했 다고 사건을 발표한다. 바로 2차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이수병씨 등 총 23명이 구속된 이 사건 관련자들은 ’74년 5월 27일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 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기소되어 6월 15일 비상 보통 군법회의 1심 재판을 시 작으로 10개월만에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게 된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이 사 건의 주요 관계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였고, 놀랍게도 판결이 난 그날밤부 터 다음날 새벽까지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된다. 공안관련사범이라 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4년은 그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춰 극히 이례적 인 이날의 사형집행은 조작의 전모가 밝혀지길 두려워한 박정희와 중정에 의한 폭거였다. 우홍선 (당시44세) 파주 금촌 평화공원묘지에 안장 1931년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출생 6∙25 당시 고교생으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1958년 육군대위 예편 1960년 4∙19 이후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민자통 조직위 간사 역임 5∙16 이후 수배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1년형, 집행유예로 석방) 1974년 4월 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이사 1974년 4월 이른바‘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끝내살리라 |97| |9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