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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철 선생 47 판단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7년 11월 4일 상하이에 도착한 후, 영 탁에서 철(澈)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8년 신 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각지로 대표를 보내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파 리대표의 활동자금을 모으며, 이를 후원하고 자 국내외에 걸친 독립운동의 전개를 촉구하 였다. 우선 자금모집을 위해 전남 영광으로 돌아와 동창 조병모(曺秉謨)의 집에 머무르 며 지방유지들의 협력을 얻고 또 자기 몫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 다. 일제 당국은 1920년 7월 17일자 궐석 재 판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며 징역 5년 을 선고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등 활약 1919년 3월 하순 ‘대한독립임시사무소’ 설 치에 참여하였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 (寶昌路) 329호 건물에 마련된 대한독립임시 사무소는 각국을 향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임 시정부 조직을 시작했는데, 그는 선우혁(鮮于 赫)과 함께 재무를 담당하였다. 그 해 4월 10 일 개최된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장병 준·한남수와 함께 전라도의원으로 당선되어 약 4개월 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1921년 3월 18일 김인전·나용균·정광호와 함께 의원으로 출석하였다. 1919년 5월 3일 구영필·김응선·송세호 등 과 함께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선임되 어 그 해 7월 6일까지 두 달여 동안 활동하였 다. 그 해 8월 5일 교통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 3월 3일까지 1년 7개월 동안 재임하 였다. 그중 1919년 11월 26일부터 12월 3일 까지 총장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아 교통총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28일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11월 18일에는 육군무관 학교 학도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 임정 군 김철의 군자금 모집 관련 『동아일보』 기사. 「기산도 등을 선동하야 군자금을 모집케한 김털, 고장 신립으로 다시 공판 / 김철의 본인은 상해에 잇다, 공판은 엇지될지」 상하이 발행 『독립신문』에 실린 김철의 「신년의 감상」 기사 (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