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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조천면 하여 조천국민학교로 향하였다. 신흥리에서도 민주청년동맹(신흥리 위원장 손범 규) 40여 명이 3·1기념식을 준비하고 참가하였다. 와산, 와흘, 교래, 대흘리에서 도 조직적, 산발적으로 조천국민학교에 모여들었다. 오전 10시께, 조천면민 약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3·1만세운동 기념식(사회 김유환)이 거행됐다. 기념식 을 마친 사람들은 행렬을 지어 제주읍으로 향했다. 이들은 오후 두 시께, 북국민 학교에 도착하여 3·1만세운동 기념식에 참가했다. 당시, 일부 조천면민들은 조천 국민학교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고 바로 북국민학교로 가기도 하였다. “조천면 관내에서 3·1절 기념식 참가는 1차 조천국민학교로 각 리단위 청년회는 집 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날 아침 8시경 모였다. 모인 숫자가 몇 명인지는 모르나 와 흘리는 30여명 정도다. 당시 순경들의 제지는 없었다. 당시는 그럴 분위기가 못 되었다. 조천국민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이자 안세훈 선생이 강단에 올라가, “피바다가 되는 한이 있더라고 전진하자”는 연설을 했고, 그 후 우리는 제주시로 출발했다. 북국민학교 에서도 안세훈 선생이 연설을 했다. 관덕정으로 가는 길에, 일곱 살 정도 된 남자아이가 기마대 임영관 순경의 말에 치이는 일이 일어나면서 관덕정이 피바다가 되었다.” 7 1948년 들어 도내 각 학교는 정상적으로 수업을 할 수 없었다. 국민학교 상황 도 비슷했다. 조천국민학교 학사보고(1948.7.15.)에 따르면, 4·3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학사운영이 불능상태에 빠져 5월 6일부터 12일까지 1주일 간 가정학습 실 습으로 휴업하였다가, 6월 13일부터 비상사태에 의한 임시휴업에 들어갔다. 그 러다 6월 26일부터 학사운영을 재개했다. 당시 재직했던 강종숙 교사는, 어느 날 11시쯤 교사 3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경찰이 와서, “당장 마을로 나가 학생들을 등교시켜라”고 하였다. 우리는 교사 1명은 학교에 남기고 둘이서 조천리를 하오 1시까지 다니며 독려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들 이 “못 나오게 선동하지 않았느냐!”며 공포를 쏘며 협박했다고 그는 당시를 기억 했다. 8 7) 제주4·3연구소, 「2017년 도민과 함께 하는 4·3역사기행 자료집」, 와흘리민 김민택 증언. 8) 제주도교육청, 『4·3 교육계 피해실태 보고서』, 200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