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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 대정면 자락 섯알오름 탄약고터(20명)에서 1차 학살함. 그리고 8월 20 일(음 7월 7일)에는 탄약고터 큰구덩이에서 모슬포 지역 주민 130여 명, 작은 구덩이에서 한림지역 주민 60여 명을 몇 시간 차이를 두고 2차 학살함1 (아래 학살터–섯알오름 탄약고터 / 한 림면 금악리-희생자 집단묘지-만벵듸 공동장지, 참조) 1) 모슬포 경찰서가 1950년 9월 3일 제주도경찰국장에게 보고한 자료(문서 제목: 예비검속자 명부 제 출의 건)에 따르면, 제주도 전체 예비검속자 820명 중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는 344명(D급 109명, C급 144명, B급 68명, A급 23명)이었다. 이중 D, C급 249명은 군에 인계돼 7월 16일~20 일 사이 어느 날과 한 달 후인 8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학살됐는데 자료나 증언마다 조금씩 그 내 용이 달라 당시 예비검속자수나 희생자수에 차이가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서 ‘제주예비검속사건(섯알 오름)’의 희생자는 218명으로 이들은 1950년 7월 16일~20일께, 그리고 8월 20일에 섯알오름 탄 약고터에서 해병대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제○중대 ○소대 소속 부대원 및 동 사령부 산하 제○대 대 소속 분대장급 이상의 하사관들에게 1, 2차에 걸쳐 집단총살됐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는 학살구덩이가 두 개 있는데 1956년에 각각 유해가 발굴돼 만벵듸공동장지(1956. 3. 29.)와 백조일손지지(1956. 5. 18.)에 옮겨 안장됐다. 당시 한림지역 발 굴유해는 61구, 모슬포 유해는 149구(백조일손지지 안장 132구, 개인 유족 안장 17구)로 알려지 고 있다. 그런데 1차 학살사건에는 의문점이 많다. 우선,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됐다고 알려진 약 40명의 행 방불명자에 대한 의문이다. 이곳 학살은 2007년 11월 27일 비행장 내 학살 장소에서 발굴한 유해 의 DNA 검사 결과 2010년 3월, 행불자 중 송대길(宋大吉: 청년회 임원)과 김희전(金熙銓: 대정교 교사)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백조일손유족회는 D, C급 예비검속자수 252명 을 근간으로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210여 명이 학살됐으므로 그 나머지 40여 명(비문에는 정확히 41명으로 명기됨)은 정뜨르비행장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했다. 진화위 보고서에는 포항 거주 전 해병대원(이○○, 해병대 모슬포부대 제○중대원, 7월 20일께 총 살집행에 참여)의 생생하고 현실성 있는 증언이 나온다. 그러나 이 증언과 당시 현장 사정을 꼼꼼히 살펴보면 자연스레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선, 보고서에는 20명 분대원이 한 명씩 총살해서 20 명이 학살됐다 처음 증언했는데 증언 뒤에서는 계속 (학살될) 사람들이 실린 트럭이 들어왔다 하고 있다. 당시 GMC트럭에는 대당 2~30명(많게는 40명도 가능)은 충분히 태울 수 있었다. 그런데 계 속 트럭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날 더 많은 사람이 학살됐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처음 20명 학살 후 의 증언이 애매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당시 현장은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터를 말하고 있는데 7월 20일께의 이 1차 학살에 대해서는 지역 주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의문이다. 8월 20 일, 2차 학살 때에는 총살 직후 주민들이 알고 현장에 모여들었다. 대비된다. 그리고 이때 학살된 20 명은 탄약고터 어디에 묻혀 있었을까? 한 달 후 학살된 백조일손지지의 큰구덩이에 같이 묻혔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그럼 한 달 동안은 처음 20구의 시신만 큰구덩이에 있다 한 달 후 130여 명이 추 가로 학살돼 그 20명이 묻힌 구덩이 위에 다시 묻혔다는 말인가? 관련 유족들의 증언에는 7월 20일 전후해 20명이 학살돼 탄약고 구덩이에 묻혔다는 증언은 없다. 이모 병사의 증언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