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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조천면 곧 조천중학원은 총파업(조천중학원 파업단 책임자 현보규, 부원 이덕구, 김민 학)으로 이어졌고, 미군정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수업이 이 루어질 수 없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경찰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갔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좌익단체인 민애청에 가입돼 있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탄압을 피해 입산하거나 타지방, 혹은 일 본으로 도피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런 와중인 1948년 3월 6일, 2학년 김용철(21 세)이 조천지서에 잡혀간 지 이틀 만에 고문치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조 천중학원 교사와 학생들은 5·10선거를 거치며 대부분 피신했고, 학교는 빨갱이 학교로 몰려 폐원됐다. 조천중학원생이었던 강두봉(1927년생, 조천리)이 아픈 증언을 남겼다. “학교 (건물이) 없기 따문에 조천지서 앞에 방범허는 창고에다가 중학원이라는 학원 을 설립했습니다. 저도 그때 18세라 지금 같으면 고등학생 쯤 될 겁니다. 여름에 (시 작). 우린 거기서 A학급 B학급해가지고 공부를 허게 됐습니다. 그 당시에 선생님은 원 장님으로 현보규 선생님, 또 이덕구 선생님, 김민학 선생님, 그담엔 김봉완 선생님, 김 석환 선생님, 총무로는 김원종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그때가 46년도. 우리가 일학년으 로 첫 번에 들어갔습니다. 인원은 80명. 80명이 넘으니까 학급을 나눴습니다. 2학급으 로. 40명 씩. 나이 많으면 A학급, 15세~16세는 B학급. 일학년이 두개 학급으로 갈라 져서 공부를 허게 됐습니다. 교무실은 저 경방단 바로 밑에, 왜놈들이 쓰던 관사가 있 었습니다. 거기 한 방은 인민위원회, 다른 한 방은 교무실로 썼습니다. 거기서 1년 정도 공부허는데 자꾸 경찰들이 주왁거리는 겁니다. 선생들 데려가서 지 서 안에 가둬서 고문허고. 죽지 안 헐 정도로 때렸습니다. 그 후에 서북청년이란 단체 가 들어왔습니다. 제주도에. 서북청년을 시켜가지고 거리에 다니는 학생들을 심어다가 무조건 족쳤습니다. 죽지만 안 헐 정도로 때리는 겁니다. 당시에 우리 학원생들도 ‘신탁 관리 절대반대!’ 이런 구호 하에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 도중에 ‘학원에 자유를 달라!’ 외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조천중학원생 한 사람이 고문당해서 죽었습니다. 경허니까 조천사람들이, ‘야, 이거 큰일 났다. 우리 아들, 딸들 다 죽겠다’ 해서, 전부 총 동원해서 일어난 겁니다. 그때 우린 우리대로 지서에서 주목허니까 거리엔 나오지도 못허고, 공부도 못 허고. 마을에선 더 이상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고, 방법이 없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