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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30년대 초 당재건운동기 전남노농협의회와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의 조직과 활동 45 해 연락을 취하면서 마산, 부산 등지에서도 조직 확 대를 도모했다. 정충조는 부산에서 ‘영남노동조합 건설준비위원회’ 기관지 창간호로 『노동자』를 정주 영과 함께 발간하여 부산 마루타이(丸太)고무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에 이것을 배포했다. 그리고 정주 영이 검거된 이후에는 박보홍, 이춘근, 성상호 등과 ‘부산적색노동조합건설주비회’의 조직 결성을 협의 하기도 했다. 정충조는 여수지역을 비롯한 전남지방과 부산, 마 산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동지 획득과 공산주의를 선전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 맹은 교양 사업을 생산 현장에서 수행하던 정충조가 1935년 4월 대구 청암사(淸庵寺)에서 검거되자 사실 상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충조와 함께 횔동했던 김수평, 하순철, 박경임 등은 이후 조직을 결성하지 않고 자유노동자와 공장 노동자를 선동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해방 공간으로 이어졌다 전남지역에 대한 조사에 기초해 여순사건을 연구 하는 최정기(전남대 교수)의 글은 일제시대 이후 해 방 공간 전남지역을 바라볼 때 많은 시사점을 제 공 한다. “당시 그(선태섭)와 함께 형(刑)의 언도(言渡)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당시는 물론이고 향후 전남지 역 및 한국 사회의 사회주의운동에서 매우 핵심적인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정국에서의 활동으 로 볼 때 가장 중요 인물로는 이정윤(2년), 박만춘(3 년), 김영재(3년), 김백동(3년) 등이 있다. … 노농협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정 국에서도 전남지역 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것이다.” (최정기, 『분단에 부딪쳐 쓰러진 민족주의자 - 선태 섭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선인, 2013, 90~91쪽) 여기에서 노농협은 전남노농협의회를 말한다. 전 남노농협의회는 전남지역의 1930년대 초 대표적인 반일 투쟁조직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동 시에 후계 조직이었던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기 도 했다. 이런 두 조직의 성과는 1930년대 초 당재건 운동기 지역을 넘어, 단절과 연속이라는 이중적 구 조 속에서 해방 공간 여순사건의 주요한 연결 고리 를 제공했다고 생각해 본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연구원,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 외국인연구원 등을  지 냈다. 이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과장,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청암대학교 교수 · 재일코리안연구 소  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 『일본지역 독립운동사 연구』, 『강제연행사 연구』, 『재일본조선인연맹 전 체 대회 연구』,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일상』, 『한국현대사와 박물관』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