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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5년 6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의병과 의병정신의 재조명’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설명하며 그에게 무기를 구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의병들은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 게 낫습니다.” 이 말에서 당시 의병들의 결연한 의지 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일본군과 싸 울 수 있는 총기나 화약도 없었고, 그저 명분과 의지,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맥켄지는 언론인의 직업 윤리상 무기를 구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그들이 처한 상황 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여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의병들은 서양인인 맥켄지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었 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일본군의 만행과 민중의 생존 전략 그가 여정을 이어가던 중, 일본군의 폭력은 곳곳 에서 확인되었다. 의병과 관련된 의심만 있어도 마 을 전체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는 일본군에게 붙잡힌 의병이 죽을 때까지 칼에 찔리는 광경, 의병을 도왔다는 혐 의만으로도 처형되는 현실 등을 듣고 목격하고 기록 하였다. 양평 일대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이 십자가 깃발이 있는 집은 불태우지 않고 넘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 이 서양의 눈을 의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따 라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고자 십자가 깃발을 구하고 자 하였고, 구할 수 없을 때는 대문에 십자가를 그리 고 있었다. 이는 당시 민중이 생존을 위해 택한 절박 한 전략이었다. 양평에서 의병 인터뷰를 한 후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서 맥켄지는 또 다른 의병부대와 마주하였다. 그들이 그 유명한 양평 인근에서 찍은 의병 사진 속 일본군의 만행으로 폐허가 된 마을 폐허가 된 마을에 게양된 십자가 깃발(이상 The  Tragedy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