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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영월엄씨대종회보 42호 역 사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 영월 엄문 세거지 약사 영월 엄문 일원은 현재 전국의 모든 곳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 야에서 엄문의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문경시에도 산 양면과 산북면, 그리고 영순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재 산양면(山陽面)에는 30개 마을에 모두 110여 각성들이 살고 있는데 이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성씨는 개성 고 씨이다. 그 다음으로 영 월 엄문이 차지하고 있는데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150여 호에 400여명이 살고 있었고 지금은 70여 호에 약 11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 위만 리 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엄문이 세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위만리(渭滿里)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선조는 중시조 충의공 흥도 충신의 증손자 희령(希齡)의 둘째아 들인 한의(漢義, 1529-1582)가 1560년경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속칭 우마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명 칭은 마을 서편에 소같이 생긴 봉우리가 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을의 북 쪽엔 홍건적의 난 을 피해 몽진을 하던 공민왕(恭愍王)과 관련이 있는 왕의산(王衣山)과 마을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예천 군 용궁면을 지나 삼강(三江)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영조 26년(1750)에 엄흥도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위만리에 별묘를 건립하고, 영조 32년(1755)에는 상절사(尙節洞를 건립하였다. 이후 순조 33년(1833)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의산서원이라 하였다. 그러 나 승격된 지 38년 만인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훼철 되고 만다. 1900년 의산서원(義山書院)옛터에 상의재(商義齋)를 복설하고 위패는 별묘에 봉안하고 충절사(忠 節弼)라 하였다. 이 건물들은 이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95년 1월 경 상북도 문화재자료 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잘 관리되고 있다. 상의재는 과거 의산서원 시절 강당에 해당하며 1954년 서원 의 일부 부지를 의산초등학교 부지로 내놓았다. 안타깝게도 1997년 39회 졸업생 1,262명의 졸업생 을 배출하고 의산초등학교는 학교로서의 생명을 다 하였다. 지금은 오미자 생산공장으로 바뀌었지만 학교 모습은 그대로 잘 간직되고 있어 졸 업생들의 추억의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위만리는 현재 전국적으로도 드물게 마을 청년들이 귀농하여 지역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로 운 농 법을 통해 새로운 농업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위만리로 다시 모여드는 영월 엄문의 청년들을 통 해 우 리 문중의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특히 최근 문경시에서 충의공 엄흥도 충신의 기념공원과 동 상 건 립 등 전통문화 계승을 위하여 건립한 조형시설물이 선조들의 충효정신을 빛내고 있다. 문경문화예술회 관장 엄 원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