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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여름 공산군은 부산 공략을 위한 막바지 대공세를 폈다. 이때 이곳 영산의 산야도 그 화력에 휘말려 시산혈하로 화했으나 우리의 혈맹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용감히 싸워 끝까지 영산을 지켜 조국의 숨가쁨을 가시게 했다. 제1차 전투(1950. 8. 5 ~ 8. 18) 8월 5일 자정, 낙동강 돌출부에서 도강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이곳을 지키던 미 제24사단과 증원된 미 제2사단 제8연대의 반격을 물리치고 7일에는 중간요지인 클러버 고지 및 오봉리 능선을 점령, 11일에는 일부 병력을 후방까지 침투시켜 한때의 위기를 빚게 했으나, 예비부대인 미 제5해병연대가 17일 영산전투에 투입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아군의 반격에 쫓긴 적은 클러버 고지 및 오봉리 능선으로 퇴각, 여기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다음날까지 계속된 아군의 맹렬한 공중폭격과 과감한 지상공격에 지리멸렬, 간신히 살아 남은 자는 낙동강 서안으로 퇴각했다. 제2차 전투(1950. 8. 31 ~ 9. 5) 제1차 영산공격에서 북한군 제4사단이 대패하자, 이번에는 제9사단이 8월 31일 심야에 훨씬 큰 규모의 공세로서 영산정면을 방어하던 미 제2사단 제9연대를 물리치고 일거에 영산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때 미 제2사단을 사단 전역(영산, 창년, 현풍)이 북한군의 각각 다른 사단에 의하여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상황이나 그 위기는 제1차 때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영산사수의 결의로 뭉친 사단을 공병대대를 위시한 지원부대까지 출동, 용감히 싸워 적의 남침을 저지했고, 마침내 미 제5해병연대의 배속을 받은 사단은 9월 3일에 총반격을 개시하여 3일간 계속된 공방전 끝에 모두 실지를 회복했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킨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자주국방 의식을 고취하여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