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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종군기자 맥켄지(F.A.Mackenzie)가 기록한 1907년 의병전쟁 41 했는데, 이천에 도착했을 때는 마을 전체가 폐허 상 태였고, 주민들은 모두 산속으로 피신한 상황이었 다. 피신했던 사람들은 “일본군에게 능욕당하느니 차라리 들판에서 죽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맥켄 지는 일본군이 민가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살해한 현 장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폐허의 현장은 목격했지만, 의병을 만나지 못한 맥켄지는 다시 충주로 돌아왔다. 처음 충주에 왔을 때 일본군 작전지도를 통 해 일본군이 제천으로 이동할 것을 알 고 있었기에 충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런데 이미 제천으로 일본군이 이동했 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제천으로 이동 했다. 제천에 도착해서도 일본군에 의 해 마을 전체가 흔적도 없이 불태워진 것을 확인했다. 특히, 제천은 의병의 거 점이라고 하여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보복 작전을 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의병을 만나기 위해 원주로 이 동하였다. 원주는 원주진위대가 봉기 한 곳으로 주변에서는 위험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원주에서도 의병 을 만나지 못하고 의병이 원주에서 양 평으로 이동했다는 소문만 들었다. 짐 꾼들도 양평으로 들어가길 꺼려할 정 도로 양평은 의병과 일본군과의 교전 이 치열한 곳이었다. 맥켄지는 의병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사동만 데리고 양평으로 이동하였다. 드디어 마주한 의병 양평의 양근 지역에 도착한 맥켄지는 마침내 실제 의병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20대 초반 의 청년들이었으며, 낡은 군복을 입고 녹슬고 제각 각인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의병 중 일부는 해산된 군 인 출신이었고, 또 일부는 포수나 농민이었다. 이들 은 불안한 얼굴로 맥켄지에게 말을 걸었고, 그들은 맥켄지가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부대(The Tragedy of Korea) 일제의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자결한 박승환 참령의 순국 기록화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