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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30년대 초 당재건운동기 전남노농협의회와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의 조직과 활동 41 첫째, 목포지역 조직을 강화했다. 특히 동아고무, 동 아직포 선하(船荷)노동조합의 조직 강화에 노력했다. 둘째, 화학부 · 정미부 · 교통부 등의 공장위원회를 조 직했다. 농촌사회의 기반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전 남을 3구역으로 구분하고 각 구역 마다 책임자를 두 었다. 특히 제2구 책임자는 정시환으로 곡성, 구례, 광양, 여수, 순천, 고흥 등 6개 군을 분담했다. 동시 에 순천과학연구회에는 정시환, 박영진, 김완근이 주동이 되어 야학교를 운영하면서 계급의식을 고취 했다. 1930년대 초 전남지역에서 조선공산당재건전남 동맹은 중심이었다 1930년대 초 당재건운동 지역 조직으로 구성된 전남노농협의회는 후계 조직을 두었다. 이것이 ‘조 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이다. 전남노농협의회는 두 번에 걸친 재건 활동과 준비회를 거쳐 1933년 초 조 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으로 지속되었다, 서기부와 노동부 정영한, 농민부와 출판부 선동기, 반제부 와 자금부 정충조가 맡았다. 이들은 이후 전남지역 항 일전선의 중심이었고 이들의 역할은 해방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은 노동부와 농민부의 관 할 구역으로 농민부는 도(道)를 1지방으로, 군에는 1 지부, 면에는 1지구를 리(里)에는 반(班)을 설치하도 록 했다. 노동부도 도를 1지방, 군을 1지구, 공장에 반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직체계 하에 노동 자의 기본조사와 노동자, 농민조합 내에서의 플랙션 지도를 주요 임무로 했던 일이 확인된다. 서기부는 조직구성원 및 다른 지방과 연락, 출판부는 기관지 『적기』를 월 1회 이상 발행하도록 했다.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은 실제로 조선공산주의 운동통일동맹의 지도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조직은 이기택, 정희면, 강병창이 중심인물이었 다. 실제로 이기택, 정희면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도쿄연락부원으로서 조직의 재건을 위해 1933년 3 여수시가 올해 3월 ‘여수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정영한 선생 홍보 포스터(전남일보 제공).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을 주도한 정 영한(1908~1966, 국가보훈부 제공). 그 는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협의로 1933 년 8월 일제 당국에 체포돼 전주형무소 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 간부 강병 창(1898~1953, 국가보훈부 제공). 그는  주로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가 경찰에 체포돼 4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