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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훼복훼형지위대죄하야(毁服毁形之爲大罪何也) 왈화하이적(曰華夏夷狄) 각유정형(各有定形 ) 원기몌이계기발(圓其袂而 其髮) 화하지정형야(華夏之定形也) 협기몌이치기발(狹其袂而 其 髮) 이적지정형야(夷狄之定形也) (중략(中略)) 고금막차위심(古今莫此爲甚) 이선왕유법지철 (而先王遺法之撤) 여운무지소산(如雲霧之消散) 무흔적지가심(無痕迹之可尋) 오호통의(嗚呼慟 矣) 범아위인자(凡我爲人者) 개장사의(皆將死矣)" 8) 《소의신편(昭義新編)》(국사편찬위원회, 1975), <척화거의사실대략(斥和擧義事實大略)> , p.256 ; 《강원의병운동사(江原義兵運動史)》(강원대학교출판부, 1987), p.99. 9) 《습재집(習齋集)》권7, <격고팔도(檄告八道)>. "금자(今者) 왜노창궐(倭奴猖獗) 국내적신 (國內賊臣) 도부지어역(盜附至於逆) 시국모(弑國母) 늑체군부(勒剃君父) 구박만성(驅迫萬姓 ) 함어견양(咸於犬羊) 사요순공주지도(使堯舜孔朱之道) 소지이진(掃地以盡) 시이황천상제(是以 皇天上帝) 혁렬진서어상(爀烈震恕於上) 육군만성(六軍萬姓) 함사불공대천(咸思不共戴天) 범 아처처봉기충의지장(凡我處處蜂起忠義之將) 필이존중화양이적위국가복수설치(必以尊中華攘 夷狄爲國家復讐雪恥) 위제일대의(爲第一大義) 의병소도처(義兵所到處) 각영각읍장관(各營各 邑長官) 약유점편관망부즉응자(若有占便觀望不卽應者) 급유부적변(及有附賊邊) 저훼군정자 (沮毁軍情者) 시개이적금수지전모(是皆夷狄禽獸之全貌) 난신적자지당여야(亂臣賊子之黨與也 ) 단이군율시행(斷以軍律施行) 선참후보가야(先斬後報可也)" 10) 10) 이소응 자신은 유인석의 제천의병과 함께 자신의 춘천의병이 전국의병항전에 끼친 영향을 "유인석이 호좌(湖左)에서 창의하니 기남(畿南),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 영동 이 상응하게 되었고, 이소응이 관동에서 창의하니 영서, 기북(畿北), 해서(海西), 관북이 상 응하게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소의신편(昭義新編)》, <척화거의사실대략(斥和擧義事實大 略)>, p. 250) 11) 11) 《소의신편(昭義新編)》, pp.256∼257 ; 《강원의병운동사》, pp.99∼100. 12) 그러나, 경군이 철수하고 난 뒤 사방으로 흩어졌던 의병들이, 이진응의 아우 이경응(李 景應) 휘하에 다시 집결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한편, 이소응이 춘천의병을 통솔하는 과정 에서 파생된 이진응, 경응 형제의 전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뒷날 유자들간에 많은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 문제가된 사항을 살펴보면, (1) 형세도 살피지 않고 경솔히 거 병한 점 (2)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한 점 (3) 패전뒤에도 죽지 않은 점 (4) 맹영재에게 포로 가 된 점 (5) 춘천의 본진으로 돌아오지 않고 제천의진으로 합류해 그 종형 이진응이 대신 전사하게 된 점 (6) 의병항전 실패 후 이름을 바꾸고 호를 바꾸어 화를 모면하려 했던 점 등이다. 이처럼 이소응의 의병항전 전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나게 되자, 유인석은 유중 악에게 보내는 서신의 장문의 별지에서 이를 조목조목 논박, 그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소 의신편(昭義新編)》, <여족숙항와별지(與族叔恒窩別紙)>, pp.101∼107) 13) 《소의신편(昭義新編)》,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 pp.161∼162 참조. 14) 본서 유인석 항목 참조. 15) 1898년 서간도 망명 이후의 생활은 유인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지속되고 있고 이들의 행동양태는 거의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