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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안덕면 혔죠. 그때 여자, 남자 걸리는 대로 다 끌고갔어요. 더데오름 앞밭까지. 거기 가서 사람 들을 집결시켜 놓고 뽑아서 죽인 거예요. 그날 군인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작전을 벌 이면서 가가동까지 가서 그렇게 한 거죠. 붙잡은 사람에 비해 실제 죽은 사람수가 적은 건 당시 젊은 사람들은 벌써 어디로 도망간다든지 해서 잡히질 않았던 거예요.” 상창리에 소개령이 내려진 것은 무장대가 창천리를 습격한 11월 29일 이후였 다. 토벌대는 이따금 이어지는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해서인지 마침내 12월 9일 에 상창리에도 소개령을 내렸다. 소개 당시 상황을 문규하(2004년 71세, 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통보도 없었어. 방애를 짓고 있는데 돌연히 다 향사로 모이라고 했어요. 난 어머니 옆에서 비로 쓸며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갔다와서는 먹을 것 싣고 다 내려가야 한다고 해요. 바로 그날 내려가라고 했어요. 아침… 한 아홉시나 열 시경이었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우린 구루마가 없으니까 짐을 쇠에 싣고, 등에 지고해서 갔는데 그날 몇 번 왔 다갔다 했어요. 마을에 불은 안 질렀어요. 며칠쯤 살았나? 우리가 창천 가서 있으니 집을 다 뜯어가라 고 했어요. 동짓달 그믐날 대습격이 들 때쯤인데… 소개하고 한 달이 되나마나했을 때예 요. 그런데 창천, 감산 두 마을에 습격이 든 후인지, 전인진 모르겠는데, 그 습격에 우리 마을 사람만 열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니 집을 뜯으라고 한 것 같아요. 경찰이 와서 방애 같은 것은 싹 태워버리고, 또 도피자 가족집 다 불태워버리고… 향사는 그래도 안 태웠어 요. 뭐, 당시 집을 뜯는다는 것이 그슨새를 걷우는 거죠. 문짝 같은 것은 떼어서 우영팟 같은 데 묻어두고. 불을 태워도 그런 거라도 살려 보려고. 그냥 그슨새 거둬서 집을 막 멜 라서 놔둔 거죠. 그때 지들커 없으니까 그슨새 져가서 밥해 먹고 다 그렇게 했어요.” 4·3 시기 상창주민들은 자신의 마을에서, 혹은 소개지였던 창천이나 화순에서 많이 희생됐다. 특히 무장대가 창천과 화순, 감산 등지를 연달아 기습하면서 토벌 대와 무장대 양측으로부터의 희생은 더욱 늘어갔다. 특히 12월 29일에는 무장대 가 감산리와 창천리를 습격하여 수용소에 갇혀있던 주민들을 산으로 데려갔다. 이 과정에서 감산리로 소개했던 오달인(47, 남)과 진경길(39, 남), 창천리로 소개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