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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해방 전후 시기 조선독립동맹 · 조선의용군의 귀환과 동향 39 의 노(老) 간부들은 즉시 조국으로 돌 아간다. 둘째 조선의용군은 만주에 남 는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무정은 부대 편성과 간부 명단을 발표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남만지대(1지대), 북만지대 (3지대) 동만지대(5지대)로 편성되었 다. 그리고 곧 목적지를 향해 각각 출 발하였다. 당시 동만지대의 일원으로 편성된 신상초는 지대장(이익성)으로부터 보 다 상세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즉 “조 국으로 돌아가기는 간다. 그러나 연 변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간다는”것이 다. 그 이유는 “연변(간도)이 중국인 비 적들로 인해 무법천지로 변모했기 때 문에 먼저 동포를 구하고 보호해야 한 다”는 것이다. 심양을 떠날 때까지만해도 의용군 대원들은 자신들이 이후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한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 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동포 사 회를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것도 만주 체류 이유의 하나였지만, 무정의 배후 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장차 벌어질 국 공내전에 조선의용군을 동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후 국공 내전기간(1945.11~1949) 내내 조선의용군 은 중공 편에 서서 활동했다. 그 가운데서 만주 한국 인들을 흡수한 의용군은 수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하 였다. 독립동맹의 귀국과 활동(평양) 무정이 오가황 소학교에서 밝힌 대로 조선독립동 맹의 노간부 70여 명은 교통 편으로 조국을 향해 곧 출발하였다. 당시 산해관전투에서 승리한 중국국민 당 군대가 빠른 속도로 심양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 심양에서 열린 러시아혁명 기념 행사에 참석한 조선의용군(1945.11.7)  독립동맹의 귀국과 조선의용군의 만주 체류를 결정했던 오가황소학교 터에 세워 진 ‘조선의용군 오가황회의지’ 기념비(중국 심양, 이상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