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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丹陽) 사람이다. 그는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거의하자 입진하여 활동하였고 유인석 의병장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자 은신 중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후 1907년 일제가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여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다시 일어나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堤川)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강년의병장은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의진에서 신광묵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자 의진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신광묵은 항일절개를 꺾지 않고 일제에 항거하여 경술국치 후인 1917년에는 단양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