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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제주읍 그 후에도 2연대의 강경토벌작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민들은 더 쫓겨 산악 지대로 올라갔고, 노형주민들은 어승생악 윗 지경인 Y계곡 인근의 청산이도에서 대부분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청산이도는 한라산국립공원 내 작은두레왓과 큰두 레왓 사이의 요새화된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궤가 둘이 있어서 한쪽에 는 어린이·노인·부녀자들이 머물렀고, 다른 한쪽에는 청장년이 피신해 있었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작전과 선 무공작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곧 토벌대는 노약자 궤를 습격해 토벌했다. 이 시 기, 청산이도, 아흔아홉골, 어승생악 등지에서 학살된 노형 주민들은 50여 명에 이른다. 노형 주민들은 1949년 봄께, 정존의 현재 노형초등학교 부지에 성담을 쌓고 마 을로 돌아왔다. 성에는 월랑, 정존, 광평, 월산마을 사람들이 마을별로 네 구역으 로 나눠 살았다. 성안 가운데에는 경찰출장소도 설치돼 돌담을 쌓고 경찰이 주둔 했다. 산에서 하산한 사람들은 귀순자촌으로 구분된 구역에 살았다. 문순자는, “노형 정존에 건설부락이라고 성을 쌓았어요. 그안에서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하 고 같이 함바집을 지어 살았는데, 얼마 후 동생이 죽어버렸어요. 제대로 먹지 못 해서 죽은 거죠. 나중엔 어머니까지 열병에 걸려 돌아가셨어요. 당시 어머니가 임 신 중이어서 아기도 같이 죽었죠”라며 당시를 기억했다. 1 당시 정존성은 규모가 꽤 컸다. 성의 길이가 동서 220m, 남북 210m 정도 되었 고, 폭이 2m, 높이 2.5m 규모의 사각형 모양이었다. 성담 밖에는 폭 1.8m, 깊이 1.8m 정도의 도랑을 파고, 거기에 구가시낭 같은 가시나무들을 잘라다 넣어 쉽 게 건너지 못하게 했다. 지금의 노형초등학교 동쪽 울타리가 당시 성의 동쪽 기점 이다. 노형주민들은 정존성에서 약 6년 동안 함바집을 짓고 살았다. 그간 크고 작은 시련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며칠 후인 1950년 6월 27일께, 성담 외각에 ‘인민 공화국 만세’가 적힌 삐라가 나붙었다. 토벌대는 이를 빌미로 그동안 겨우 목숨만 부지했던 청년들 일부를 다시 예비검속으로 끌고가 학살하기도 했다. 1) 제14회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 팸플릿, 『4·3 당시 민간인 최대 피해마을, 노형 해원·상생굿』, 2016,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