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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을사늑약(을사5조약)과 의병전쟁 37 일어났다. 특히 전남 장성 출신의 기산도(奇山度)는 1906년 2월 16일 야밤에 이근철(李根哲)·이범석(李 範錫) 등 동지들과 함께 을사5적 가운데 가장 원성이 높던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습격, 머리·어깨 등 10여 군데를 난자해 중상을 입혔다. 이 거사로 인해 도성내의 친일 매국적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전 율하게 되었으며, 이완용 등 5적들은 밤에도 불을 켜 놓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떨었다고 한 다. 을사5적 처단의거는 기산도에 뒤이어 나인영(羅 寅永)과 오기호(吳基鎬) 등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을사의병의 봉기와 의의 이와 같이 전국의 민심이 을사5조약 늑결을 계기 로 격분하여 항일 적개심으로 끓어오르고, 더욱이 국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자, 전 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여 항일전을 전개해 나가 게 되었다. 을사의병은 일제에 의해 침탈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국권회복전쟁이었다. 을사의병 시기에도 전국적으로 다양한 의병운동 이 전개되었는데, 우선 원용팔이 포수들을 중심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거병하였다. 충청지역에서는 1906 년 봄에 전(前) 참판(參判) 민종식이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호남지역에서는 최익현이 1906년 6월에 는 태인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을 사의병기에는 평민출신 의병장의 활약도 두드러져 대표적으로 신돌석 부대가 경북 영양과 청송 등의 내륙지방과 울진 등의 해안가를 넘나들며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을사의병기에는 의병이 정예화되며, 의병부대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최 익 현의 태인의병, 민종식의 홍주의병은 외국 공사관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성토하여 외국의 지 원과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을사의병은 대한제국 국권을 회복하고, 일제의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한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독립전쟁의 정신적 기반을 마 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홍주성전투 참가 의병들의 항쟁을 드러낸 의병 군상(충남 홍성 소 재, 홍성군청 제공) 필자 엄찬호 강원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등에서 한국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 등을 강의하였다. 현재 (사단법인) 의암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1992),『정선의 민족 운동』,『춘천의 항일 독립운동 사적지』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