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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김영환 장군! 그는 1920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형인 김정렬 장군과 함께 우리 공군 창설과 그 육성에 신명을 기울이며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명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6.25 한국전쟁 중에는 탁월한 결단으로 우리 민족의 성보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포화의 위기에서 구하는 호국호법의 큰 공을 세우고 1954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하여 그 고귀한 명예를 영원히 남기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고려말 몽고병을 물리치려는 거국적 원력으로 시작한 호국의 얼이 담긴 민족의 성보로 조선 세종때에는 왜의 끈질긴 기증요구에 중신들은 응하려 하였으나 세종의 결연한 의지로 보존되어 오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낙오자 9백여명이 해인사에 주둔함으로써 민족의 성보는 위기일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1951년 7월 경남지구 공비보벌에 참여한 김영환 장군은 동년 9월 18일 오전 6시 30분 지상군 부대의 긴급 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4기편대로 합천상공에서 정찰기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는다. 정찰기로부터 지시된 훈령은 해인사의 공비소굴을 발사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표시용 백색연막이 선명하게 목표를 가리켰고 그 곳은 바로 대적광전의 앞마당이었다. 네이팜탄 1발이면 팔만대장경판은 물론 해인성지가 곧 잿더미로 바뀌고 말 찰나에 놓였다. 바로 이때 김장군은 목숨건 상부의 폭격명령을 어기고 요기에게 명령했다. 각기는 나의 뒤를 따르되 나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트탄을 투하하지말라 다시 정찰기로부터 독촉명령이 내려졌고 2, 3, 4번 기장들은 편대장에게 재차 폭격명령을 내려줄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편대장 김장군의 뜻은 단호했다. 각 기장들은 일체 공격을 중지하라는 날카로운 명령만이 무전기를 통해 전해졌다. 다만 사찰 상공을 몇바퀴 선회한뒤 해인사의 뒷산 능선 넘어로 폭탄과 로켓트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 대장경판이 보존된 장엄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참으로 목숨건 탁월한 판단과 애국심으로 이룬 불멸의 위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해인총림 대한민국 공군이 뜻을 모아 그의 빛나는 호국호법의 장렬한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 공적비를 세운다.
호국하온 민족혼인 고려팔만 대장경판 국난중에 호국하고 재난에도 호민했네
6.25의 위기맞아 김장군이 지켰으니 호국장군 아깝게도 서른네살 젊은나이
순국으로 산화하니 짧은 시간 굵게살다 가야한이 변함없듯 동해바다 고갈되고
백두산이 마멸되나 위대하신 그이름은 이나라와 함께하여 영원토록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