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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春明목사는 一八五六년 이천군 송계리에서 출생하여 여주군 가남면 삼군리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인물됨은 체격이 건장하고 우람하여 타에 위압감을 줄수있었다. 의협심이 강하고 호담하여 불의에 참지못하는 성격이라 지방토호의 행패가 있었을때 이를 저지시켰다. 간악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이 있은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할때 이천에 具然英의병장과 합세하여 이천 넓고개전투 광주 이현전투를 거쳐 남한산성을 점령했으나 패하고 제천 안동 등지로 내려가면서 패전만 거듭하니 具然英과 귀향하여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때에 조원시 선교사의 전도로 一八九七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一八九八년에 삼군리에 교회를 세우니 여주군에서 최초 교인이고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一八九九년 三월에 이천지역 첫 세례식을 덕평교회에서 베풀때 세례를 받고 勸書가 되어 이천 광주 여주 음죽 양지 죽산 음성 충주 제천 그리고 문막등지에 복음책을 지고 태산준령을 넘고 물을 건느며 복음을 전하였다. 여주군을 위시하여 三十八개 처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여주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 여주중앙교회는 一九○○년부터 전도하여 一九○二년에 장목사 소유의 기지를 헌납하고 초가집 二十간을 개조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교역자를 많이 양성하였는데 元容漢목사를 전도하여 세례를 주고 후계자를 양성하였다 뿐만아니라 여주군에 신교육을 개척하였으니 一九○四년 삼군에 開信학교와 청안리에 韶成학교 여주읍에 여흥학교를 설립하였으나 一九一○년 국치후 폐교되었다. 그후 여흥학교는 여주공립학교의 전신이다. 여주교회 十二년을 위시하여 충주 공주 이포 이천지역 순행목사등을 거쳐 三十三년 동안 성역을 하고 六十七세로 은퇴하였으나 은거할 한칸의 집이 없어 삼군교회 뒤편 작은방에서 두벌 옷도 없이 가난을 낙으로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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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에 남매가 있었는데 성혼하였으나 일찌기 세상을 떠나는 감당키 어려운 시련도 겪으면서 늙음에 고독한 삶을 사시다 一九三三년 하늘나라로 가시었다. 여주중앙교회에서 장목사님의 공적을 기리 간직하고 후배에 귀감을 삼고자 교회창립 九十주년을 기념하여 이 비를 세움에 있어 그의 행적을 축소하여 銘記하는 바이다. 복음을 지고 산을 넘는 복음의 使者여! 발은부르트고 아픈 허리에 시장하여도 지칠줄모르는 발걸음이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가시덤불을 캐내고 돌작밭을 옥토로 이루려는 복음의 사자여 피와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던가! 복음의 씨 뿌리기에 온갖 시험도 많았고 멸시와 천대 모욕당했으나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한 복음의 사자여! 늙은 복음의 사자여 기력이 쇠진하여 메뚜기도 짐이되었도다. 한칸의 집도없이 한벌의 옷도 없이 식사조차 가난했으나 낙으로 사시다 찬송부르며 기쁨으로 하늘나라에 가시었도다 님이여 뿌리신 피땀 헛되지 않아 조국은 광복찾고 번영을 구가하며 님이 다니시던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고 특히 여주읍은 대성전에 큰 교회로 성장했나이다. 님이여 천국에서 기뻐하소서 一九九四年 十一월 二ㄹ十七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원로목사 김동욱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