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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5년 4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과 한국독립운동’ 내외 모든 공산그룹을 통합하려는 대통합론, 혁명의 본거지는 조선 민중이므로 내지에 근거를 둔 공산그 룹을 위주로 통합하려 한 내지통합론, 어중이 떠중 이 다수를 묶어서는 안되고 가장 우수한 그룹들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소(小)통합론이 따로 따 로 전개됐다. 세 갈래 통합운동이 경쟁적으로 이뤄 졌다. 결국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 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떠들썩하게 개최 된 전조선기자대회에 일본 경찰의 감시 눈초리가 쏠 린 틈을 타서, 아서원(雅敍園)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는 경향 각지의 17개 세포단체 대 표자 19명이 참석했다. 이 창립대회는 소통합론의 결실이었다. 내지당, 북성회파 공산당, 일부 상해파 (上海派) 공산당 인사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달리 표현하면 창립 당시의 조선공산당은 3개 공산그룹 의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의 활동, 독립운동사에 나타난 변화 조선공산당이 성립된 이후 한국독립운동사는 큰 변화를 겪었다.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민족주의가 후퇴하고, 새로이 사회주의가 그를 대체 했다. 3·1운동 때만 하더라도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 부는 기독교, 천도교에 관련된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세력은 위축되 고 활력을 잃었다. 그 자리를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새로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이 가장 역점을 둔 활동은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식민지 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이었 다. 사회주의를 처음 개척한 1918년의 한인사회당 에서부터 해방 직전의 경성(京城)콤그룹에 이르기 까 지 모든 사회주의 단체가 조선 독립을 당면의 근본 목적으로 상정했다. 6·10만세운동이 그 보기다. 조선공산당은 순종 황 제의 장례식을 기하여 제2의 3·1운동이 발발하기를 기대했다. 당 중앙은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거행하 기로 결정했고, 2인의 중앙간부 김단야와 권오설에 게 격문 발행과 현장 시위 지도부 구성을 위임했다. 6·10만세운동은 항일 군중시위를 촉발하려 한 조선 공산당의 첫번째 기획이었다. 6·10만세운동에는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특 징이 있다. 조선공산당 단독이 아니라 천도교와 함 께 공동으로 이 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현장에 살포된 격문의 작성자 명의는 대한독립당이었다. 조 선공산당은 6·10만세운동의 의의를 “민족적 통일전 선을 작성할 제1보”를 내딛는 데에 두었다고 스스로 천명했다. 1929~30년 전조선학생운동 때도 그랬다. 광주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학생 운동을 이끈 세력은 사회주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1929년 11월 3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가두 시위 형태로 폭발했을 때, 식민지 통치 당국은 이 폭 발의 재연과 확산을 막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 때 문에 대중투쟁이 광주 일원에 고립될 위기에 처했 다. 이때 조선공산청년회가 나섰다. 그 단체의 전라 도 책임자인 장석천(張錫天, 1903~1935)의 매개적 역할 덕분에 서울에서 후속 시위가 발발했다. 12월 9일에 제1차 연합가두시위가 터져 나왔고, 다음 달 인 1월 15일∼16일 제2차 연합가두시위가 벌어졌 다. 대폭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