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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35 란 뜻)’이 조직됐다. 이 그룹은 북성회(北星會)라는 공개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므로, 북성회파 공 산당이라고 불렸다. 이와같이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기에 앞서 국내외 에 걸쳐 다섯 개의 공산그룹이 활동하고 있었다. 어 느 공산그룹에 속했던지 간에 상관없이 당시 사회 주의자들은 통일된 공산당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 견을 같이했다. 그래야 조선혁명을 성공으로 이끄 는 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이해했다.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만들려는 노력이 여기저기 서 이뤄졌다. 그러나 의견이 세가지로 나뉘었다. 국 6·10만세운동 당시 조선공산당이 살포한 「격고문」 일본어 번역본 의 마지막 부분. 대한독립당 명의로 작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 김재봉 생가 앞에 세워진 김재봉 어록비 (국가보훈부 제공). 극동인민대표회의 참석시 기록한 참가목적 “조 선독립을 목적하고…”라는 어구가 새겨져 있다. 국가보훈부 경북북부보훈지청에서 ‘이달의 우리 지역 현충시설’로 안동시 소재 ‘근전 김재봉선생  어록비’를 선정했음을 알리는 홍보 포스터. 근전 (槿田) 김재봉(金在鳳, 1891~1944)은 신학문 전 수, 군자금 모금, 독립신문 보급, 1922년 극동인 민대표회의 참석 등 활발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가  되어 활동하다 6년간 옥고를 치른 후 현장에 복귀 하지 못한 채 1944년 안동의 향리인 학암고택에 서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