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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장군의 최후와 압송로
전봉준 장군의 체포와 압송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 장군은 끝내 최후를 맞이한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전봉준은 남쪽으로 피난을 하여 순창 피노리에 도착하였다.
전봉준이 피노리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고부 접주로 활동할 당시 집사 업무를 맡아보던 김경천(金敬天)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금을 탐낸 김경천은 민보군을 조직하고 있던 전라감여 퇴교 한신형, 김영철, 정창욱 등과 함께 전봉준이 묵고 있는 주막을 포위하고, 잔혹한 몽둥이질을 통해 전봉준을 잡아 공회당에 가둔 뒤 관군에 인계하였다. 이후 한신현은 그 댓가로 현상금 1천냥을 받고, 황해도 금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김영철은 300냥, 정창욱은 200냥, 마을사람 9명이 200냥의 현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순창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인 교도대(敎導隊)은 1894년 12얼 2일에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 ~ 용전리 묵산마을 ~ 신광사재 ~ 구림면 금창리 금상 마을로 압송로를 정하여 순창 관아로 끌고 갔는데, 이는 전봉준을 따르는 동학 농민군과 일반 농민들에게 발각 되지 않고, 전주의 전라감영으로 압송하기 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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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관아에서 12월 7일 담양을 경유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나주에서 1895년 1월 5일 출발하여 1월 24일 서울 주재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전봉준은 몇차례 심문을 거쳐 2월 3일 법무 아문으로 인도되었고, 재판을 거쳐 3월 30일 최경선,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하였다.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