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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의 전개 제1차 봉기(반봉건 운동) 고부농민봉기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전봉준은 무장지역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다시 수천 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하여 고부 백산에서 궐기하였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쓸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전주성을 점령한 후 관군과 농민군은 접전을 벌였고, 서로 타격을 입었다. 이즈음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5얼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이에 나라 안밖에 위급상황을 인지한 전봉준은 5월 8일 관군과 패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텐진조약(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동등 파병권)에 따른 청나라 군의 개입을 빌미로 5월6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 인천에 상륙하였다. 화약을 맺은 관군은 몇몇 부대를 전주에 남기고 모두 철군하였고, 동학농민군도 철군 및 해산했다. 그러나 군인의 행장이 혼란과 미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차지거주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때 1차 패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民政)을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