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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5년 6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의병과 의병정신의 재조명’ 교권을 박탈 · 제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04년 10 월에는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다 수타로[目賀田 種太郞]가 부임하였고, 12월에는 외교고문으로 미국 인 스티븐스(D.W.Stevens)가 임명되었다. 일본은 그 밖에도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관의 임용을 강 요하여 궁내부·군부·경찰·학부에 각각 일본인 고문 을 두게 하였다. 을사5조약의 늑결(勒結) 1905년에 들어서자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를 배경으로 하여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경제적 침 탈을 강화하였다. ‘한일병탄’의 선행조건으로 대한 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일본의 외교공작은 포 츠머스 강화회의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었 다. 그 결과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에 의해 미국의 승인을 얻은 데 이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 의 체결로 영국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 문제에 대해 미국과 영국 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낸 뒤 10월 27일 각료회의에 서 구체적 실행방침을 수립하고 ‘을사늑약’의 초안 을 작성하는 등 제반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조약 늑 결을 총지휘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1월 9일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날 고종황제를 알현하여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 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一從)하여 조치”하라는 일왕 의 친서를 전하고 황제를 위협하였다. 이토 히로부 미는 11월 15일 고종황제를 다시 알현하여 좌우를 모두 물리치게 한 뒤 사전에 준비한 조약의 원안을 제시하며 승인을 강박하였다. 16일에는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486~1557]가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을사늑약이 강요된 덕수궁 중명전(국가유산청 제공) ‘을사5적’의 제복 착용 모습. 모두 자랑스러운 듯(?)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다. 왼쪽부터 이지용·박제순·이근택·이완용·권중현(이상 나무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