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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5년 4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과 한국독립운동’ 가운데 4명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조선공산당은 일본 경찰의 혹독한 탄압 대상이었으므로, 비밀결사에 가담하는 행위는 두렵 고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와 용기를 갖지 않고서는 그에 가입하기 어려웠다. 조선공산당의 성립 조선공산당은 여러 공산그룹의 연합 조직이었다. 공산그룹이란 복수의 세포단체와 그들을 지휘하는 단일한 중앙기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독자의 정치적 정강과 조직적 규율율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정치세 력을 가리킨다. 여러 개의 공산그룹이 모여서 조선 공산당을 만들었다. 최초의 공산그룹은 해외에서 출현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으 로 개명)과 1920년 이르쿠츠크에서 만들어진 전로 (全露)고려공산당이 그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국외로 망명한 사람들과 러시아 이주민들 가운데 사회주의를 수용한 사람들이 그 대열을 구성했다. 1921년부터 두 단체의 명칭은 똑같이 고려공산당 으 로 명명됐다. 그래서 전자는 중앙기관을 상해에 뒀 기 때문에 상해파 공산당이라고 불렸고, 후자는 이 시파(이르쿠츠크의 조선어 명칭) 공산당이라고 지칭 됐다. 조선 국내에서 공산그룹이 나타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였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그 혁명적 불꽃 속에서 단련된 청년 세대가 대거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경찰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리에 결성되 느라, 그 움직임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1922년 초에 서울에서 두개의 공산그룹이 나타났다. 하나는 조선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자임했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조직됐다 해서 ‘내지당(內地黨)’, 또는 해외 두 공산 그룹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해서 ‘중립 당’이라고 불렸다. 다른 하나는 고려공산동맹이라는 명칭을 가졌는데, 공개단체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의미로 ‘서울파 공산당’이라고 불렸다. 1923년에는 귀국한 일본 유학생 출신 사회주의자들 이 중심이 된 제3의 공산그룹 ‘까엔당(조선인민당이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린 중국음 식점 아서원의 내부 모습(『京城日報』 1931.3.5)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들(오마이뉴스 장호철 제공).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왼쪽), 이준태(가 운 데), 권오설. 이들은 모두 경북 안동시 풍산면 주변 출신이라 '풍산 트로이카'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