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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을사늑약(을사5조약)과 의병전쟁 33 1905년 11월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 하고 이근택 등 ‘을사5적’의 찬성을  받아낸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 케는 고종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스스로 대한제국 외부(外部)의 도장 을 탈취하여 조약문에 멋대로 조인하 였다. 을사늑약은 일제가 폭압적 공 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찬성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통치권자 인 황제의 승인과 서명, 그리고 국새 의 날인을 받지 않은 명백한 불법조 약이었다.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을 사의병기에는 의병이 정예화되며, 의 병부대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 로 확대되었다. 최익현의 태인의병,  민종식의 홍주의병은 외국 공사관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성토 하여 외국의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기 도 했다. 을사의병은 대한제국 국권 을 회복하고, 일제의 식민지화에 저 항하기 위한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독립전쟁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했다 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로 부상한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둘러싼 외국 열강의 간섭을 배제하고 대한제국을 정치·군사 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중국 뤼순[旅順]항 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시작하 였다. 이 무렵 제국주의화한 일본(일제)은 전쟁 도발 직후에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정치·군사적 간섭의 토대를 구축한 뒤, 5월 30일 자국의 각의(閣議)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 · 「대 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등으로 요약되는 대한제국 침략의 구체적 방안을 논의 · 결정하였다. 한일의정서가 군사전략상의 편의를 도모하 기 위한 것이었다면,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은 정치 · 외교 · 경제 등 군사 방면을 제외한 제반 분야에서 국권장악을 목표로 한 것으로, 장차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장·단기 계획안이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또한 1904년 8월 22일 ‘한일협정서’라 부르는 제1차 한 일협약을 체결하여 소위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자행하였다. 곧 일본은 이 협약에 근거하여 한국의 정치·외교 분야에 고문을 배치하여 재정 · 외 하세가와 일본육군 대장과 함께 마차를 타고 한국통감부로 향하는 이토 히로 부미(앞쪽, 위키백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