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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연합작전 성과     33 립을 쟁취하겠다는 ‘무장독립전쟁 노 선’을 시정방침(施政方針)으로 정하고,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삼았다 (『독립신문』(1920.3.4. 참조). 1920년 2 월에는 「대한민국육군 임시군구제」를  마련해 만주 및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부 대를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의 지방사령 부 독립군으로 편성하는 계획을 추진하 였다. 추진하는 독립전쟁 시기에 대한  입장 차이와 군자금 확보 문제 등 난제 가 많아 쉽게 해결되지 않았으나 북간도 의 ‘북로군정서군’과 서간도의 ‘대한광복군 총영’은  각각 임시정부 북간도 및 서간도 군구 지방사령부로  편입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북로군정서(사령관 김좌진) 등 북간도지역 독립군  연합부대의 ‘청산리대첩’의 승리는 독립군부대들의  연합항전의 결과였다. 임시정부는 편제상 동도독립 군서(사령관 홍범도)와 북로군정서군(동도군정서와  동도독립군서 연합부대, 사령관 김좌진)으로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독립군부대  통합노력의 성과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청산리대첩은 대한제국군 및 신흥무관학교 출 신들이 교관과 장교가 되고 그들이 훈련시킨 병사들 이 크게 기여한 독립군부대들의 빛나는 성과였으며,  신민회와 임시정부 독립전쟁 전략의 대표적 성공사 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독립전쟁 의 적기’였는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독립군기지 건설 사업은 1920년 10월  이후 일본군의 ‘간도침략’과 ‘간도참변’(일명 ‘경신참 변’)으로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만주침략(1931.9.18)과  일제 의 괴뢰 ‘만주국(滿洲國)’ 설립(1932.3.1) 이후 독립 운동 단체들의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게 됨에 따라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 일제의 만보산사건 (萬寶山事件, 1931.7. 2) 흉계로 발생한 중국인의 반 한감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종의 대일특무공작 (對日特務工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그 임무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기념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면전구 작전 참가도(출처: 육군본부,  『한국군사사』 10(근·현대 Ⅱ), 3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