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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2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해방직전 중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모임 장소 문지기를 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50년 서울대 사회학과 를 졸업하고 ’52년 잠시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부산세관에 근무하였다. ’56년 미국 유학을 떠나 몬타나주리대학 경제학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57 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전학하여 계속 박사과정을 밟았다. ’60 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62년 9 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위원으로 박정희 정권의 문제와 노동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63년 6.3사태후‘민주사회 동지회’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 작하였다. 동지는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 민족의 운명이 남의 손안에 있고 남의 군사적 보호밑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민족적 치욕의 극치라고 생각 하고 남한 독자적인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건설하여 독재정권과 맞서야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동지들과 조직을 만들어 갔다. 또한 ’68년 1월‘남조선해방전략 당’문건을 작성하고 동학의 조직운영 형태인 접과 포의 형식으로 조직을 운영하 였다. 당시 통혁당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통혁당 준비 담담자 김종태 동지와 만났 으나 서로 조직노선과 북한과의 관계설정에 합의되지 못하여 각자 조직을 만들 어 갔다. 중앙정보부‘통혁당’조사시에 동지가 준비 중인 조직이 중앙정보부에 알려져 소위‘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으로 조작이 되었다. 동지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중앙정보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탄압에 사건이 조작되었다. 중앙정보 부는 동지가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만났다는 이유로 북한과 연계짓고 소위‘남 조선해방전략당’을 통혁당 산하 조직으로 묶어 조직사건을 만들었다. 동지는 ‘남조선해방전략당’당수로 지목되어 ’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 행을 당했다. 동지는 남한의 독자적 힘으로 자주와 민주, 통일을 쟁취하는 과업을 학문적으 로 논리적으로 또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오면서 그 시대에 접할 수 있는 경험과 지적수준에서 정열적으로 몸소 실천한 진정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이였다. 끝내살리라 |65| 권재혁 (당시45세) 1925년 함양 산청 출생 1950년 서울대 문리과 사회학과 졸업 1952년 10월 경신중학교 교사 1952년~1954년 부산세관 근무 1956년 6월 도미유학 몬타나주리대학 경제학과 1957년 8월 미국 몬타나주립대학 경제학과 박사학위 과정 이수 1957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전학 계속 박사과정 이수 1960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 1962년 9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1963년 6.3사태후‘민주사회동지회’(혁신계의 결집체)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 1963년 7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사임 1963년 8월 한국 수산개발공사 영업책임자로 한국 귀국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지도와 수배자를 자택에 숨겨줌 1968년 1월 ‘남조선해방전략당’문건 작성 1968년 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남조선해방전략당’의 당수로 지목 19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 |6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