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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으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견월악 인근 숫모루, 물장오리 인근 성진 이, 산남기모루에 은신해 추위와 배고픔을 견뎠다. 그러다 일부는 토벌대에 학살 되고, 또 다른 일부는 잡혀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9년 3월께 토벌대의 귀순 공작에 따라 대부분 귀순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박태전 2 의 이야기가 한 토 막 남아 전설처럼 전해진다. 영평하동 주민 30여 명은 마지막으로 산남기모루에 은신했다. 이때 이곳을 남로당제주도당 핵심간부였던 박태전이 찾아와 ‘귀순’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영평리 수수못은 당시 5가호 정도의 주민들이 살았던 하천변 자연마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4·3 후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변해버렸다. 현재 영평동 은 상동에 신흥 주거단지가 조성되고, 마을 위쪽인 해발 300~400 고지 사이에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영평초등학교는 1946년 개교 당시에는 하동에 있었으나, 4·3으로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불에 타 폐교되었다가 1968년 상동으로 옮겨 새로이 개교했다. 영평리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8년 7월 9일: 문창순(28, 여)이 남편 행방을 모른다는 이유로 딸과 함께 토벌 대에 총살됨 11월 16일: 김병구(45, 남) 가족 3명, 김하가(43, 여) 모자 2명과 오훈주 3 (61, 남)가 무장대에게 납치됐다 살해됨 11월 17일: 영평리에 소개령이 내려진 날로, 토벌대가 마을을 급습하여 김 병생(22, 여) 일가족 3명을 비롯한 주민 8명을 학살함 12월 18일: 김재원(72, 남) 일가족 6명이 피신생활 중 토벌대에 발각돼 총 살됨 2) 영평리 출신.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공부했고, 4·3 당시 제주북국민학교 교사 역임. 그는 무장대 총 책 김달삼의 비서장을 하다 귀순·전향한 후 귀순공작대를 조직하여 전도를 순회하며 귀순권고 삐라 를 뿌렸다 함.(제주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 2권, 283쪽) 그러나 유족들은 그가 1949년 2월 경 찰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고 알고 있음 3) 오훈주의 장남 오두현(40)은 화북3구 선거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4월 28일 무장대에게 살해됐음. 둘째 아들 오병현(27)은 대동청년단원으로 무고를 당해 형무소에 수감된 후 행방불명됐 고, 셋째 아들 오진현은 경찰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