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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령 제5호
보복적 발본색원 의도
1951년 6월 10일 오익경 연대장의 청취서 기록을 보면 학살이 일어난 4개 작전지구가 빨치산들의 보급원이 되고 있다고 추측 판단하여 마을 주민들과 빨치산들을 동렬에 놓고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11사단 지휘부는 작전지구가 빨치산의 거점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여 군경에 피해를 주는 마을 주민들을 보복적 의도에서 발본색원하였을 것으로 본다.
사건 당시 국군 지휘명령 체계는 국방부 장관 신성모, 11사단장 최덕신, 9연대장 오익경, 3대대장 한동석이었다.
학살의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남북 군사분계선인 38선을 남침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9월경 부산과 낙동강 이남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점령되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뚫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사이,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우리 국군은 서울을 다시 찾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북한군은 보급로가 차단되고,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하였다. 중국이 1950년 10월 19일 26만여 명의 병력을 북한에 투입하면서 6·25전쟁은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다음 해인 1951년 후퇴하던 북한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이 실시되었다. 토벌작전이라는 미명하에 하달되었던 작전명은 '견벽청야. 이렇게 우리 군의 무자비한 양민 학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지리산 산골 마을 4곳(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 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주민들은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고향을 지키며 피란을 가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51년 2월 7일 산청·함양 4개 마을의 주민 705명은 영문도 모르고 우리 국군에게 통비분자로 간주되어 무참히 학살되고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