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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를 동원하고 기총소사까지 감행한 무모한 민간인 학살 작전이었다. 죽성과 함덕 주둔 군부대, 삼양지서 경찰과 민보단이 총동원된 토벌 대는 동서남북을 포위하고 토끼몰이 식으로 주민들을 몰아가며 무차별 학살을 자 행했다. 360명을 사살하고, 130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압수품에 총기는 한 점도 없이 고작 식량과 의류뿐이었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회천리 주민들은 화북, 삼양, 조천 등지의 해안마을에서 소개생활을 하다 일부 는 1949년 봄 함명리로 개명된 봉개리가 재건되자 그곳에서 삶을 이어갔다. 그 러던 1953년, 마침내 회천리 재건을 허가받은 주민들은 동·서회천에 성을 쌓고 마을을 복구했다. 그러나 자연마을인 드르생이, 새가름, 산물낭우영은 복구하지 못해 지금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회천리의 주요 주민학살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8년 4월 6일: 홍만원(39, 남)이 집에 들이닥친 청년들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 명됨 12월 1일: 문원봉(32, 남)을 비롯한 4명이 석구왓궤에서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됨 12월 4일: 김매옥(18, 여)을 비롯한 5명이 석구왓궤에서 토벌대에 붙잡힌 뒤 함덕백사장으로 끌려가 총살됨 1949년 1월 10일: 양병원(38, 남) 일가족 6명이 마을에서 토벌대에게 붙잡혀 총 살됨. 이날 김사언(63, 남) 부부를 비롯한 주민들이 감낭우영에 서 학살됨 (회천리-학살터-감낭우영, 참조) 3월 5일: 이임생(38, 남)은 친척이 경찰이라는 이유로 교래리에서 무장 대에 피살됨 현재 정부가 인정한 회천리 희생자는 모두 130명(남성 100명, 여성 30명)이다. 1) 『조선중앙일보』, 『대동신문』(1949년 2월 9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