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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5년 4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과 한국독립운동’ 키당은 빨치산(partisan)체제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흑룡주(黑龍州)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한인사회당 간 부들도 함께 움직였다. 그러나 도피 도중 흑룡강 위 의 배위에서 체포되어 하바롭스크로 압송되었다. 김 립, 전일, 유동열 이인섭 등은 석방되었으나 책임자 였던 김알렉산드라는 9월 16일 카르미코프 백위파 군에게 처형되고 말았다. 이 결과 한인사회당은 활 동기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후일을 도모하며 당 원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한인사회당의 역사적 의의 이들이 다시 조직을 정비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재 개하는 것은 1919년 3 · 1운동 이후 국내외의 민족운 동이 활성화되면서 부터이다. 1919년 4월말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를 개최되 었 다. 대략 당원 1만 명의 한인사회당과 단원 2만 명인 신민단(新民團)을 대표한 49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두 조직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신민단은 침례교 계 통인 성리교(聖理敎) 신도들을 기반으로 한 신민회 계열의 단체이다. 3 · 1운동 후 간도 지방에서 ‘조국 광복’을 목표로 무장활동을 추진하고 있던 강력한 비밀독립운동단체였다. 한인사회당은 신민단과의 통합을 통해 창당 당시 망명 한인민족운동가들과 지 식인 중심이었던 것에 비하여 3만 명의 당원을 포괄 하게 되면서 대중성이 크게 강화되었다. 한인사회당 의 재건에는 3 · 1운동의 성과가 커다란 추동력이 되 었다. 한인사회당은 창당 당시 볼셰비키 세력의 주 도와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1919년 1919년 8월 이동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한인사회당의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냈다.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한인사회당의 김립.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신원미상, 김철수, 계봉우, 신 원미상(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