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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사회주의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점, 한인사회당 29 단 철도 연선의 주요 도시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암 묵적 지원을 받은 체코군에 의한 반볼셰비키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연해주는 볼셰비키 혁명 세 력의 기반이 취약하였다. 10월 혁명 지지 세력과 반 혁명 세력 간의 각축장이었다. 연합국이던 러시아 혁명 정권은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것을 우 선순위로 하였다. 혁명 정권의 안정을 통한 혁명 방 어가 절실한 상황에서 막대한 영토 손실까지 감수하 면서까지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Brest-Litovsk Treaties) 조약을 체결하고 단독 강화를 실현하며 대 독일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이는 일본 등 연합국의 무력간섭의 임박과 이에 고무된 러시아 반혁명세력 의 재집결에 따른 내외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 던 볼셰비키 정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로한족대표자회 대회에는 노령의 유력한 한인 지도자 130여 명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여호인과 원 호인을 대표하는 이동휘와 최재형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크라스노쇼코프와 김알렉산드라가 참 가하였으며, 원동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한인사회 당 간부인 유스테판이 특파되었다. 한인사회당을 중 심으로 한 대표단은 당시 주요 현안이었던 노령 한 인들의 토지문제와 한인 노동자들의 합법적 지위문 제에 대해 소비에트 권력만이 해결 할 수 있다는 입 장이었다. 그에 따라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지지와 승인을 얻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렇지만 사회혁명당의 영향력 하의 원호인 중심의 다수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대회 마지 막 날인 6월 22일, 23일 진행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의 주요 간부로 선출되지 못하였다. 이후 한인사회당은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했지만 결정적인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5월 이후 서부 시베 리아 지역의 체코군의 봉기에 호응하여 6월 29일 체 코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 으켰다. 이로 인해 연해주를 포함한 전체 원동지역 의 정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7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다국적 지역(International Zone)’으로 선포하고 체코군의 구원을 명분으로 러 시아 원동에 대병력의 군사적 출병을 단행하였다. 일본 역시 시베리아의 재일(在日) 거류민을 보호한다 는 구실을 앞세워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였다. 일 본은 체코군과 러시아 혁명정부의 반대편인 백위파 군(白衛派軍)과 협력하였다. 연해주, 흑룡주, 자바이 칼주를 유린하며 볼셰비키 정권을 붕괴시켜 나갔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카르미코프, 세묘노프, 카모 프가 이끄는 백위파군은 하바롭스크, 치타, 블라고 벤첸스크를 점령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볼셰 비키 정권을 대신하여 사회혁명당 계열의 임시자치 시베리아정부가 들어섰다. 일본은 연해주의 한인 민 족운동을 강하게 탄압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본에 대응하는 볼셰비키혁명 세력과 한 인 민족운동가들의 이해와 요구는 일치할 수밖에 없 었다. 크라스노쇼코프와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의 간 부들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공동 대책을 논의 하였다. 반제·반일의 국제적 연대에 대항할 적 위대(赤衛隊) 모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전일 (全一), 유동열 등은 100여 명의 한인 적위대를 이끌 고 볼셰비키 적군(赤軍)과 함께 우수리 전투에 참가 하여 연합군과 합세한 카르미코프의 백위파군과 싸 웠다. 이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반 이상의 한인들이 전사하였다. 1918년 8월 말 하바롭스크시의 볼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