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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목격한 농민의 말이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이천수창의소가 막강한 일본군과의 첫 전투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승리를 거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 이천수창의소는 일본군과의 첫 싸움인 광현전투를 크게 승리함으로써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이천의 진의 사기진작에 큰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 이천의진이 의병항쟁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장거리를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항전할 수 있던 정신력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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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이현전투 광현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병 지휘부는 황소 세 마리를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게 한 후 이튿날 부터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 1월 25일 눈이 내리는 바람에 훈련을 중지하고, 조성학을 이현으로, 구연영을 남천, 김태원을 원적산으로 보내 주요 길목을 지키게 하였으며, 신용희는 여주 경계를, 김귀성은 양지 경계를 각각 지키도록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또한 심종만으로 하여금 한강 위아래를 순찰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초기 이천의진의 활동범위가 당시 읍내면과 신둔면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지금의 용인시 경계와 동쪽으로는 이포 방면의 남한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월 27일 이천수창의소에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고종의 비밀조칙이 전달되었다. 김하락을 비롯한 이천수창의소 지휘부는 조칙을 안고 통곡하며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하니 의병들의 사기가 더욱 충천하였다. 이천수창의소는 참모 이춘용을 충주, 청주 등지로 보내어 의병 봉기를 독려하였고, 전귀석을 여주로 보내서 여주대장 심상희와 협력하도록 하였다. ▲ 진중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한 광현전투 직후 이천수창의소의 세력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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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전투에 참패한 일본군은 2백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이천을 공격해왔다. 1896년 2월 11일 적병이 광주부에 당도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받자 전군에 영을 내려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4개의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왔는데 김태원은 정면에서 돌격전을 벌이고 조성학은 원적산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구연영은 이현 동구를 지키고 신용희, 심종만은 좌우로 복병하였으며 김하락은 높은 곳에 올라 지휘하고 민승천 대장은 종사관 안옥희, 최진엽과 더불어 중앙진영을 고수하도록 하였다. 곧 쌍방 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하루 종일 치열하게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양 군은 일시 후퇴하였다. ▲ 청일전쟁(1894-1895) 무렵의 일본군: 이천수창의소를 토벌하기 위해 이천으로 진격(1896)한 일본군도 거의 동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인 2월 13일 새벽, 다시 전투가 벌어져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 하필이면 이천의진이 있는 방향으로 강한 서북풍과 눈보라가 일어 의병들이 얼굴을 들고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예기치 않은 날씨 탓에 이천의진은 참패하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일본군은 이현으로 들어가 한 동리를 고스란히 불태우고 '닭, 개 마저 없앴으며 사방으로 의병을 수색하였다. 결국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를 당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천수창의소는 눈보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하루 종일 일본군과 대등하게 싸웠을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본문의 내용은 이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이천독립운동사』(1996)에 실린 이천의 항일의병전쟁 관련 자료를 기반으로 최근 연구 자료를 일부 보태어 재구성하였습니다. 이천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무던히도 많은 밤을 지새우셨을 이천의 연구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