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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수창의소는 안성에서 합류한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서울에 내려온 5인의 중심인물 외에도 대장 민 승천은 안성 사람, 종사 안옥희는 광주 사람, 후군장 박주영은 여주에서 활동하던 인물, 돌격장 심종만은 음죽(혹은 죽산)에서 활동하던 인물, 좌군장 김귀성은 이천에서 활동하던 인물로 각 지역 출신을 고루 안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하락은 이천수창의소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휘부를 각 지역 의병장이나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구성하였을 것이다.
김하락이 직접 대장을 맡지 않고 민승천을 추대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의병들의 출신지도 광주, 여주, 양평, 용인, 안성 등 인접지역은 물론 포천, 시흥, 수원까지 포함한다. 즉 이천수창의소는 처음부터 경기도 각 지역 의병의 연합체 성격을 띠고 출발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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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의 쾌거. 이천수창의소의 무력항쟁
① 광현전투
대오 편성을 마친 이천수창의소는 곧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병 봉기 소식을 들은 일본군이 1월 17일(음력 12월 3일) 수비대 병력 1백여 명을 파견하여 이천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 한다. 김하락은 대장 민승천에게 복병계를 건의하였다.
"저놈들은 연습을 받은 군사요. 우리 군사는 얽어 뭉친 군중들이라 아직 기정의 변법과 주객의 형세와 적을 저항하는 방책에 익숙하지 못하니, 먼저 복병을 하여 덮쳐 무찌를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 1895년 1월 이전수장의소가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넣고개(廣峴)의 옛 모습
이에 김태원이 이끄는 부대는 광현(廣峴)아래 깊숙한 골짜기에 매복하고 김귀성, 신용희는 광현 상봉, 조성학 은 광현 아래쪽 산 오목한 곳에서 대기하였다. 1월 18일 새벽. 마침내 일본군 수비대가 광현으로 접근하고 이천 수창의소의 첫 번째 전투, 광현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의 전투 상황을 「진중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과 더불어 맞아들여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근하여 백현(광현)으로 향해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라 쫓아와 백현 아래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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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문득 대포 소리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 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 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횡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은 포위망 속에 빠져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엄습해 무찔러, 적병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한참 동안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 하늘에 떠있는데 서릿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이윽고 달은 지고 저녁 10시경이 되자 적은 한 가닥 길을 찾아서 암암리에 도망하므로, 좌우의 우리 군사는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 장항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초닷샛날 새벽이었다. 샛별은 반짝이고 닭 울음은 여기저기 들리는데 위아래 행진에서는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이천수창의소는 의진 결성 후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한 첫 전투에서, 만 하루 동안의 치열한 접전 끝 에 패주해 가는 적을 광주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진중일기」는 농민들의 말을 인용하 여, "그저께는 적의 군사가 1백80명이었는데 어제는 겨우 36명만이 패해 달아났고, 또 오늘 죽은 적을 제외하 면 살아 돌아간 자는 응당 두어 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