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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은 당시 33살로 구연영보다 한 살 위이며 별군직과 선전관에 종사하고 있던 현직 무관 출신이지만 유학에도 깊은 소양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태원은 후에 유인석의 제자가 되어 그의 학통을 이었으며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조성학은 김하락의 이종사촌으로 역시 서울에 거주하는 유생 신분이었고, 마지막 신용희는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다만 5인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평소 김하락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하여 의병항쟁의 길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단발령의 소식을 접한 다음 날 서울을 떠나 곧바로 이천에서 의병조직에 착수하는 일은 사전협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김하락이 이천의 진을 결성하기 이전에 이천과 인근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단발령을 공포하기 직전인 12월 19일 동경조일신문에 '충주부 내의 충주, 이천, 음죽, 제천, 괴산, 진천 등지에서 적도들이 횡행하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문제는 '적도(賊徒)'라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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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산적, 비적 따위의 무리를 일컫는 단어일 수도 있으나 당시 언론에서는 항일의병도 '적도'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즉 동경조일신문이 보도한 '적도'의 무리가 단순범죄자집단이 아닌 실제 항일 의병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물론 아직 추측에 불과할 뿐 단발령 직전의 이천 의병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김하락이 정식으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기 전에 이미 산발적인 형태의 의병활동이 실제로 이천에서 있었다면, 아마도 김하락 일행이 이천으로 내려와 짧은 기간 동안 대규모 의진을 편성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초기 이천의진의 모집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인물은 이천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이다. 1월 1일 이천에 도착한 김하락 일행은 방춘식을 불러들여 포군 명부를 가져다 놓고 포군 1백 명을 징발 하여 함께 의병 모집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구연영은 2개 대의 포군을 거느리고 양근, 지평 두 고을로 떠나고, 조성학도 마찬가지로 2개 대를 거느리고 광주로 떠났으며, 김태원은 안성으로, 신용희는 음죽으로 보낸 후 김하락은 이천 이현에 머물며 총지휘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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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김하락의 의병 모집이 단기간에 큰 성과를 거두어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방춘식과 그 휘하의 화포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이 김하락 일행에 가담하여 모병에 앞장섰고 그 결과 광주, 음죽, 죽산 등지의 별패진 포군, 화포군 등 정규군이 상당수 가담하였다. 지금도 김하락 일행이 의병항쟁의 근거지로 이천을 선택한 이유는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김하락 일행이 이천에 도착하자마자 방춘식을 만났고, 그가 처음부터 의병 모집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사전에 어 떤 교감이 이루어졌거나, 적어도 김하락 일행과 방춘식 사이에 친분관계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김하락은 진중일기에 이때의 모병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조성학은 광주 산성에 들어가 별패진 군관 김순삼을 시켜 별패진 포군 3백여 명을 일으키게 하여 김순삼, 이준성 두사 람으로 통솔하게 하였고, 구연영은 양근, 지평으로 가서 군사 3백여 명을 일으켰으며, 신용희는 음죽, 죽산으로 가서 화 포군 3백여 명을 일으켰고, 또한 포군으로 자원해 온 의병도 1백여 명이었는데 본군 사람 심종우로 하여금 통솔게 하였 고, 김태원은 안성으로 들어가 그 고올에서는 이미 창의하여 민승천이 대장이 되었으므로 서로 합세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창의하는 사람이 각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용인, 안성, 포천, 시흥, 수원, 안산 등 여러 고을에서도 모두 의병대를 모집하여 일제히 이천수창의소로 모여드니 이로부터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어 드디어 대오를 편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