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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장산면 대리에서 인동장씨 송모공 진접과 하동정씨 사이의 4형제(병준,병상, 홍재, 홍엽)중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천성이 효우근직하였다. 아호를 포양이라 하며 19세때 김구, 신익희, 조병옥과 의형제를 맺고 조국 독립운동에 몸바칠것을 결의하고 일본에 유학 일본대학 법과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1919년 3월 18일 광무황제의 안장식을 거행한다고 집합시킨 군중들에게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경의 추격을 받게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정원 의원과 국무위원에 피임되었다. 상해 일정의 밀명을 받고 상해를 비롯한 만주, 시베리아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35개 독립지사들의 세력을 임정산하로 규합, 민족의 행동통일에 지대한 공훈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0년 초 군자금 조달차 귀국한 선생은 서울에서 이동욱과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손과 발이 으스러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일경의 간담을 서늘케 하시였다. 동년 12월 21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선생은 송내호, 김면수등 동지와 협력, 민흥회를 발족, 국산장려, 금주 단영등 국민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상기 동지 27인과 신간회를 조직하곡 목포지회장을 역임하며 중앙대표로 선출되여 민족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좌익세력의 준동으로 동지들이 투옥되고 조직이 와해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부위원장, 한민당 광주지부장, 여순반란 수습대책위원장,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자유당 독재정권곡가 맞서 해방조국의 통일과 민주화에 헌신하였으며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해 욕심없이 사시었다. 선생의 나라를 위한 업적은 이루 헤아리기 여려울 정도의 초인적인 애국자이셨지만 목메이게 바라던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72년 3월 16일 오전 11시 30분에 79세를 일기로 서거하시니 정부에서는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여 3월 20일 사회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또한 선생의 공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고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