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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의병 연합체-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초기 의병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895년 (고종[高宗] 32, 을미년)에 일어난 을미사변과 단발령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일제와 친일 관료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곧이어 전통 사회의 질서와 가치관의 붕괴를 의미하는 단발령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거세게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경기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천, 광주, 여주, 시흥, 안성, 죽산, 포천, 양근, 양주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이천은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경기 의병 활동의 중심이었다. 이천의 을미의병 운동은 서울에서 내려온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회 등이 창의한 이천수창의소의 활동으로 집약할 수 있다. 김하락은 의병 봉기를 결심하게 된 배경을 진중일기(陣中日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 을미년(1895.10.8)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국장(國葬)과 단발령 지령문(189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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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8월 21일 밤에 적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이 일본 군대를 불러 궁중에 들어와 난을 일으키고, 안 대궐로 넘어들어 우리 국모를 살해하였으니, 아! 지극히 통분한 일이었다....(중략)... 11월 15일 밤에 유길준 등 여러 적당히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대궐 안에 들어와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이어 조신들의 머리를 깎으며, 다시 관리와 병졸들을 발동시켜 그 칼을 가지고 사방으로 횡행케하여 도성 안 사람들이 대개 늑삭을 당하며 이 화를 면한 자는 극히 적었다. 이른 바 예의의 나라가 어찌 이토록 부패될 줄이야 기했겠는가." ▲ 이천수창의 소의 활약을 기록한 김하락의 『진중일기』 김하락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을미의병의 주요한 봉기 원인은 외세 침략에 대응한 국권수호와 함께 전통 유교 사회의 붕괴에 따른 위기의식이었다. 이는 을미의병이 주로 해당 지역의 저명 한 유생을 중심으로 모였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유인석, 이소웅, 허위, 이강년, 김도현 등이 대표적인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6년 1월 제천의 유인석은 이강년, 이인영, 이필희, 서상열 등과 기의할 것을 협의하고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 하였다. 이에 맹영재, 김백선 등은 지평에서, 이소응은 춘천에서, 허위는 선산에서, 노응규는 진주에서, 김복한은 홍주에서, 기우만, 기삼연은 장성에서, 이병채는 홍양에서, 이채구는 경주에서, 유시연, 김도화는 안동에서 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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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 집결한 의병들은 유인석을 의병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처럼 유인석 부대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천에서 봉기한 김하락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단발령을 발표한 직후 김하락은 의병 조직에 착수하여 항전의 기치를 내걸었다. 1895년 12월 30일(음력11월15일)에 단발령을 발표하자 김하락은 다음날 아침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1월 1일 이천에 도착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유한철 연구원의 논문을 인용하여 김하락을 포함한 5인의 신상 내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하락은 184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당시 50세로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다. 본명은 김길주로 '키가 크고 시원스러우며 그 말은 쾌활하고 씩씩하다'고 묘사되었으니 유생 신분이지만 활달한 무인 기질을 겸비한 인물로 보인다. 구연영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본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광주군 실촌면에 세거하였다. 후일 김하락과 영남 지방까지 동행하였고 중간에 헤어져 이천으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천 지역 항일운동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