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page

273 제주읍 봉개리는 1949년 봄, 마을 재건이 시작됐다. 당시 마을 재건은 2연대의 선무공 작 차원에서 이루어져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당국에서는 일부 건축 자재를 보조하거나 벌채를 허가해 복구를 도왔다. 재건 후 봉개리라는 마을 이름 은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딴 함 명리(咸明里)로 개칭됐다. 교회도 함명교회로 명명됐다. 당시 토벌대는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봉개교회에는 당시 달아놓았던 종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2~3년 전까지만 해도 눈에 띄던 봉개리의 재건주 택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다음은 봉개리의 주요 학살사건이다. 1948년 4월 9일: 김향진(60, 남, 봉개국민학교 교장)이 자택을 습격한 무장대에 살해됨. 그 후 9월 7일에는 교사 김상수(22, 남)가 무장대에 살 해되고, 1949년 10월 2일에는 교사 고의학(29, 남, 영평리)이 정뜨르비행장에서 토벌대에 총살됨 4월 20일: 강좌빈(22, 남)이 토벌대에 아라리 박성내로 끌려가 총살됨 5월 10일: 김정석(53, 남, 구장)이 집을 습격한 무장대에 살해됨 12월 8일: 임경숙(36, 여) 모자 등 4명이 명도암 부근 대경밧에서 토벌대 에 총살됨 12월 16일: 강상추(60, 여) 일가족 4명이 대경밧에서 경찰에 총살됨 1949년 1월 6일: 고경생(50, 여) 일가족 3명 등 5명이 봉개리를 급습한 토벌대 에 살해됨 1월 10일: 강세원(70, 남) 부부 등 5명이 봉개리를 수색하던 토벌대에 발 각돼 총살됨 1월 17일: 강경생(20, 여) 등 18명이 토벌대에 멀왓동산으로 끌려가 학살 됨 (봉개리-학살터-멀왓동산, 참조) 2월 4일: 토벌대의 이른바 ‘동부8리 작전’으로 강공수(18, 남)를 비롯한 봉개리 주민 46명이 토벌대에 학살됨. 이날 강수추(37, 남) 등 2) 『조선중앙일보』, 『대동신문』(1949년 2월 9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