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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있었다. 그러나 1947년 3·1발포사건이 벌어지고 미군정의 주민 탄압이 가속화되 며 큰 희생을 치르기 시작했다. 1948년 4·3무장봉기가 발발한 직후에는 무장대가 마을 유지들을 공격했다. 봉 개국민학교 교장 김향진이 4월 9일 자택을 급습한 무장대에 끌려가 학살됐고, 5 월 10일에는 마을구장이었던 김정석이 자택에서 살해됐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은 11월 20일께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부터였 다. 당시 마을이 불에 타자 해안마을로 소개간 일부를 제외한 많은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나중 화북, 삼양 등지로 피난갔던 주민들도 ‘산간마을 사람은 다 죽인다’는 소문과 해안마을을 습격한 무 장대의 권유에 따라 다시 고향마을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주민 피해는 더욱 늘어갔다. 1949년 2월 4일, 군경토벌대는 동부8리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도련1·2구, 회 천, 봉개, 용강, 월평, 영평상·하리 등 제주읍 동부 8개리를 대상으로 한 이날 작전 으로 작전지역내에 은신해 있던 많은 주민들이 학살됐다. 그 사이 은신처가 토벌 대에 발각되기도 하여 소규모로 주민학살이 이어지던 지난 몇 달간의 상황과는 아주 달랐다. 이날 작전은 영평리 쪽 서부 산간지역은 죽성의 설새미에 주둔했던 부대가 공 격했고, 회천리 쪽 동부 산간지역은 함덕리 주둔 군부대가 담당했다. 그리고 해안 쪽 삼양에서 도련리로 이어지는 지역은 함덕 주둔 군부대와 대동청년단, 경찰이 맡아 공격했다.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와 작전지역 내의 모든 주민들을 봉개리로 몰아 섬멸시킨다는 이 토끼몰이식 작전에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전에 대해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4일 상오 3시를 기하여 제주읍 봉개지구에서 함병선(咸炳善) 연대장 지휘 하에 육해공군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방금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다 하는바, 그 동안 제2대대 제7중대의 과감한 용사들은 소위 인민군 재판장 강태문, 암살대장 박응 수 등을 비롯한 폭도 간부들을 체포하고 제3대대에서는 반란군 1등 중사 고영준을 체 포하는 등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판명된 전과는 다음과 같다.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식량 의류 등 다수압수 (국방부 검열제) 【제주 발 합동】”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