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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사회주의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점, 한인사회당 27 서 소통과 협력의 역할을 하였다. 약소민족의 권리 보장에 적극적인 러시아 혁명정부의 등장은 한인 민 족운동가들을 고무시켰다. 김알렉산드라와 같은 한국계 볼셰비키 당원들과 교류를 하던 이동휘(李東輝), 김립 등은 러시아 혁명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는 한인 항일운동 세력의 이념적 · 조직적인 모색에 따른 내재적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1918년 3월 원동인민위원회 위 원장인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yokov)와 하바 롭스크 볼셰비키당의 책임비서 김알렉산드라의 후 원과 지도로 한인정치망명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예 상되고 있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러시아, 중국의 반일애국단체들에게 대표 파견의 요청서를 발송하였다. 이동휘, 김립, 양 기탁, 이동녕, 홍범도, 김성무, 유동열, 김규면, 김하 구, 안정근, 오하묵, 박애, 이인섭 등 노령과 중국 각 지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 혁명과 한국독립운동의 관 계 설정을 둘러싸고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졌다. 하나는 한국독립운동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순수한 독립운동을 위한 광의단(光義團)을 조직하고 원동인 민위원회로부터 후원만을 얻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다수파를 형성한 다른 그룹은 볼셰비키와의 밀접한 연대를 강조하였다. 이동휘 그룹, 한인사회당 창당 다수파를 점했던 이동휘 그룹은 1918년 5월 김립, 오성묵, 유동열, 김 알렉산드라, 유스테판, 이한영, 박애, 전일 등과 함께 ‘반일(反日), 반제(反帝)의 사회 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채택한 한인 최초의 사회주 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러시아로 입적 하지 않은 망명한 한인 민족운동가들과 진보적 원호 인 한인 2세 청년들의 결합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혁 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한국 독립 달성의 길이라 생각하였다.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과제, 즉 민족해 방이라는 항일독립의 과제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민 하바롭스크시 원동인민위원회 건물(왼쪽). 이 건물에 새겨져 있었던 김 알렉산드라의 부조 (오른쪽).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시의 원동인민위 원회 외무위원으로 활동한 김알렉산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