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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기록한 영현제위는 1950년 7월 9일(음력 5월 24일) 6.25 남.북 전쟁초-1945년 8월15일 일본강점 식민지에서 해방시킨 미군과 소련이 조국영토를 북위 38도선 남과 북으로 분단하고, 미군과 소련군이 군정을 펴다가, 1948년 8월 15일 남쪽에 '대한민주공화국' 자본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같은해 9월 9일 북쪽에 '조선인민공화국' 공산주의정부를 세우고 각각 "북한 멸공통일"과 "남조선인민 해방"을 외치며 무력통일을 준비해오다가 1950년 6월 25일에 북쪽 '조선인민군'이 남한 영토를 밀물처럼 점령해오자 - 남한 이승만정권 수뇌부의 지시를 받은 경찰과 국군이 헌법과 법률에 의한 재판.판결절차없이 '조선인민군'에 동조 협력하여 남한 정권에 반역할 것'이란 예상을 하고 남한 전국 각 지역에서 백만 여명의 양민을 불법.예방 집단학살한 만행의 일부분으로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산골짜기에서 근처 각 면 '전향 민간인단체'- 해방직후 국민들의 사상과 이념의 혼란기에 '좌익.공산주의 성향'을 보이다가 '자유 민주주의로 전향한 국민을 보호하고 선도한다"고 경찰청 지역경찰서 각 면 지서별로 조직한 민간인단체원 - 400~780명을 집단학살한 희생자중 괴산군 사리면 양민 79위입니다. 그런데 국가정권이 수호해야할 생명을 그 정권의 불법예방 학살만행으로 빼앗긴 원통함을 말할 길이 없고, 동량인 가장을 잃게된 가정들은 무너지고, 유가족과 친척 친지들의 분노와 비탄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정권은 이분들에게 "죽여야할 공산당원"이며 유가족들에게는 "공산당원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씌워 억압하고 '보안법'과 '연좌제'에 의한 인권과 생활권을 제약하므로, 어쩔 수 없이 침묵과 망각으로 50여 년을 지내는 동안 원혼들은 구천을 헤매고 계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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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1960년 4.19민주혁명직후 '불법민간인학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고 '유족회'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자 1961년 5.16군사혁명정권이 '반공을 국시'로 하며 모든 활동을 억압.구속.중형처벌까지 하여, 또다시 죽은 듯이 살아야 했습니다. 40여년간의 비민주정권과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1992년 '문민정부', 1997년 '국민의 정부'라는 민주화된 정부가 집권하니, 유족들과 뜻깊은 인사들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각 지역별로 결성하고 위령비를 세우며 위령제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0년 9월 7일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2001년 9월 6일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 통과시켜 정부가 '불법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규명'을 하고, 당시 정권을 대신하여 사죄하고, 누명을 벗겨주고, 원한을 풀어주며, 명예회복과 재발방지에 힘쓰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현정부와 정치인들의 동향을 보아 이루어질 날을 기약할 수 없어 2002년 10월 3일에 '사리면 불법학살 희생양민 유족회'를 결성하였고, 우선사업으로 위령비를 세워 드리며 합동위령제를 올려, 영현제위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안식.극락영생하시기를 축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족들과 친지들이 협력하고, 뜻깊은 인사들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충북지역 대책위원회, 법국민위원회, 전국.지역유족회등의회원들 - 이 격려지원하고, 재경 '사리면민회장 곽덕근님을 비롯한 유자녀들이 지극한 정성을 보여, 영현들께서 지켜보시며 도와주셔서, 이 비를 세워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영현들께서 국가권력의 불법만행에 의한 원한을 푸시고 안식.극락왕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울러 영현 제위의 유가족들과 친척들의 통한과 비탄도 모두 이 비를 통하여 위로 받아 풀리고, 이런 뜻이 후세대에 전해져 위령.안식,추모의 참배기도가 이어지고, 이후 이 땅에서 인권.생명경시.불법.예방학살 만행이 재발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2003년 10월 3일 위령비 건립추진위원들이 함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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