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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은 명실공히 조선 최대의 서양식 저택이었던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의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최근에는 심윤경 작가의 소설 <영원한 유산>을 통해 이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더더욱 세간의 주목을 끈 바 있다. 하지만 윤덕영이 짓고 살았던 또 하나의 별장, 즉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있었던 강루정(降樓亭)에 대해서는 그 동안 대중에게는 물론이고 학계에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자주 이곳을 찾았는데, 이곳에서 손님을 맞기도 했고, 또 여러가지 자선 사업 등을 벌이기도 했다. 한 예로 <조선신문> 1933년 6월 22일자에는 윤덕영이 별장에 있는 서당에 교문리 일대에 살던 20여명의 "무산아동"을 데려와 무료로 공부를 시켰던 기록 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후 윤덕영이 1940년 10월 18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의 무덤이 자리잡은 곳도 바로 이 등룡동 강루정 뒷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1930년대 말 과소비와 사치 향락으로 기울어가던 윤덕영 일가의 가세는 윤덕영의 사망 후 급격히 기울어 갔고, 결국 해방 직전에 이르러 그의 양손(養孫) 이었던 윤강로(尹强老)는 옥인동 벽수산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재산을 매각해 팔아버리고 말았는데, 이때 매각된 자산에는 이 강루정 별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강루정은 6.25의 참화를 간신히 버텨냈지만, 주인 없는 집이 되어 계속해서 퇴락해가던 중, 1958년에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주인 없는 좋은 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를 매입한 뒤, 강원도 모처의 자기 소유의 별장 경내로 건물과 분수대만 뜯어가 버렸다. 이때 박흥식이 뜯어간 강루정 안채는 1970년대 말 다른 사람에게 매각된 이후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960년대 말에는 이 일대에 남아있던 윤덕영의 묘를 비롯한 해평 윤씨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주와 양주 등지로 이장되거나 파묘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1970년과 1971년에는 강루정 정원과 후원이 자리잡았던 381번지의 임야가 둘로 쪼개져 절반은 서울삼육중고등학교의 교사 부지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통일교가 매입해 가면서 흔적이 없어졌다. 이때 삼육중고등학교 측에서는 운동장과 기타 시설물들을 만들기 위해 강루정 후원과 그 주변의 각종 석물 등을 불도저로 전부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별장의 존재는 그 후로 완벽하게 잊혀져, <구리시지> (1996)를 비롯한 향토사 서적은 물론 거의 어떤 책에도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출처 : 뉴스톱(https://www.newstop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