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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사회주의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점, 한인사회당 25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1910년대 무 단통치를 피해 해외로 나간 망명세 력들, 즉 러시아 지역의 민족혁명 세 력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러시아 한 인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중심 공간은 블라디보스토크가 위치한 연해주(沿 海州) 지역이었다. 1918년 5월 창건 된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으로 이 어졌지만, 4년여 만에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졌다. 한인사회당은 한인 최 초의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뿐만 아니 라 중국 · 일본보다 먼저 해외에서 사 회주의 정당을 처음 만들었다는 점,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이 일제와 효과 적으로 싸우기 위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세력과 연대하며 국제적 조직으 로 발돋움 했다는 점, 사회주의 이념 을 바탕으로 다양한 계층, 계급을 망 라하는 보편성을 가진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식 민통치에 반대하여 싸운 모든 운동은 민족의 독립운동 범주 안에서 고찰되 어야 한다. 한인사회당을 포함한 사 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역시 일제강 점기 항일민족운동사의 한 역사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 10월혁명, 한인들 삶과 민족운동에 큰 영향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은 전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단기간에 종결된 혁명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1917년 10월 혁명이후 내전 이 종결되는 1922년 10월 말 혁명 세력이 원동(遠東) 끝자락의 블라디 보스토크를 점령할 때까지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러시 아 혁명으로 인한 러시아 사회의 혁명 과정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 들의 삶과 항일민족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월 혁명으로 민족차별적인 봉건 차르체제가 붕괴됨으로써 노령(露 領)의 한인들은 민족적 각성과 활발한 정치 · 경제 · 문화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2월 혁명이 가져온 대변화에 대응 하여 비교적 빠르게 움직임을 보인 것은 원호인(元戶人, 러시아 입적 한 인)들이었다. 사회혁명당(에스.엘. Social Revolutionary Party)계열의 지식인인 한명세, 김만겸과 원호인 부호인 최재형, 문창범 등은 1917 년 6월 고려족중앙총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원호인들의 우선적 과제는 러시아내에서 한인의 자치와 권리 신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만 여호인(餘戶人, 비입적 한인) 즉, 한인 민족운동가들이 배제됨으로서 항일운동과 관련한 여타의 이슈들은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불만은 1918년 초 한족중앙총회 발기로 나타났다. 친볼셰 비키 원호인 지식인들과 여호인 망명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빈농층과 노동자들의 입장을 중시하였다. 한족 중앙총회의 발기는 여호인들을 배제한 고려족중앙총회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서 10월 혁명의 대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한종중앙총회측의 주요 인물들은 오와실리(유영준), 유스테판, 김립, 채성오, 이한영 등으로서 ‘원호인과 여호인을 불문한 특별대동단결’을 표방하였다. 특히 한인의 교육 보급과 실업 진흥에 주안점을 두었다. 1918년 1월 고려족중앙총회와 한족중앙총회 양측은 국적과 상관없이 러시아내 한인의 대단결과 금후 5개월 안에 헌장회의를 소집 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 중앙간부로 위원장에 문창범, 부위원장 겸 학무부장은 김립, 총무부장 겸 서기에는 장기영, 재무부장은 서윤철을 선임하였다. 또한 한용헌, 김립, 장기영, 김하구로 헌정기초위원을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