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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오월의 꽃' 박금희(朴今喜, 1963~1980)
'오월의 꽃'이 된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 박금희. 그녀는 1963년 아버지 박병민과 어머니 문경덕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명여중을 졸업(1978)하고, 은행원이 되기 위해 춘태여자상업고등학교(현, 전남여상고)에 입학한 그녀는 늘 성실하고 예의바른 모범생이었으며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1학년 대는 훈련부장(지금의 선도부장), 2학년 때는 학습 대의원에 뽑힐 정도로 급우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책임감도 강한 학생이었다. 그녀의 생활기록부에는 "예의바르고 책임감이 강할 뿐 아니라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정의파"라고 쓰여 있다. 1980년 5월 19일, 버스를 타고 농성동 집으로 가던 그녀는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한다. 그리고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와 금남로로 향하던 중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듣고 광주기독병원을 찾아 헌혈한다. 하지만, 병원을 나선 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시신이 되어 다시 기독병원을 찾게 된다. 양림다리를 건너던 중 상공에 떠 있던 헬기에서 발사된 게엄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 것이다. 박금희가 죽자 친구들은 그녀의 책상에 흰 국화꽃을 바쳤고, 그녀를 가르쳤던 교사들은 11주기를 맞은 1991년 5월, 그녀가 꿈을 키우던 교정에 '팔십년 오월의 꽃 박금희 순의비'를 세워 그녀의 희생과 사랑을 기렸다. 순의비 뒷면에는 시인 임동확의 추모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제 피를 나누어 형제를 구하는 일이 산 세상의 제일 큰 사랑이거늘, 여기 그것도 모자라 아름답고 순결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벼랑에 처한 조국의 대지 위에 수혈하고 숨진 한 소녀가 있었으니, 그리하여 천년에 또 천년을 지지 않는 이름의 꽃으로 다시 부활하리라." 1989년 2월,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는 박금희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고, 그녀는 자랑스러운 전남여상 졸업생으로서 후배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