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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중문면 들은 하는 일 없이 무전취식을 일삼았습니다. 민가에 가서 쌀이나 돈을 강요했고, 관공 서에 가서도 국민배급을 달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이때 서청의 감정 을 산 사람들이 후에 많이 죽었습니다.”10 서청의 위협 때문에 경찰에 투신했다는 이기호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다. “난 본래부터 국민회 등에서 우익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우린 불과 10여 명이었고 대 부분은 인민위원회 소속이었지요. 그러니 주변으로부터 나무람을 받으며 활동했지요. 그러던 중 유해진 지사가 1948년 5월경 면사무소 공무원들을 우익인사들로 대거 개편 했어요. 즉, 그 전에 있던 중문면장 이봉옥(李奉玉), 부면장 이승조(李承祚, 중문중학원 장 겸임)를 파면하고 독립촉성국민회 간부인 조창국(趙昌國, 애월리 출신)을 중문면장 에, 역시 국민회 간부인 원기영(元氣榮)을 부면장에 임명했습니다. 또 우익인사 박돈재 (朴敦在)를 총무계에 앉히고 내게는 ‘면사무소 산업계 서기로서 양곡을 장악하라’는 임 무가 부여됐습니다. 그런데 서청이 문제였어요. 서청은 본래 비무장이었는데도 민폐를 심하게 끼쳤습니다.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 내 기억으론 처 음엔 5백원을 받다가 1천원으로 올렸어요. 당시 1천원은 큰돈이었습니다. 서청은 면사 무소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면 회계원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내게는 쌀 을 강요했어요. 당시엔 원칙적으로 수확한 양곡은 전부 공출한 후 이를 다시 배급하는 식이었습니다. 면직원들은 절량농가를 조사해 특별배급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서청 은 특별배급을 요청하면서 자기들 인원의 5배가량을 달라고 떼를 썼어요. 내가 못 한 다고 버티자 면장과 부면장에게 압력을 가했어요. 그 일로 면사무소에서 소란이 벌어 졌습니다. 난 우익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담벼락에 날 숙청하라는 좌익삐라가 나붙어 위험을 느끼던 터였는데 이번엔 서북청년단에게 밉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1948년 10 월 30일에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서귀포경찰서에 있다가 11월 5일 중문지서 피습사건 이 나니까 내가 중문 출신인 점이 감안돼 약 1달 간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중문지서에 온 지 보름만에 중문리에서 서청에 의한 대대적인 주민학살이 있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직전에 경찰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서청에게 죽었을 겁니다.”11 10)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4권, 1997, 252쪽.